스페인 식민지시절 생겨난 부활절 문화 맨발로 걸으며 채찍질·십자가 퍼포먼스 성스러운 신앙 행위로 전통처럼 이어와
망고의 계절을 맞아 지인이 있는 필리핀 클락으로 떠났다. 현지는 연일 체감온도가 40도를 넘는다는 소식에 조금은 부담을 안고 비행기에 오른다.
늦은 밤, 클락 공항을 나서니 밤공기라서인지 다행히 열기가 없다. 숙소에 도착하니 실컷 먹고 가라며 그 비싼 망고를 큰 박스 채 사놨다. 두리안, 망고스틴, 바나나, 용안, 코코넛 등도 함께. 열대과일로 허기를 채우는 호사를 누린다.
다음날, 푸닝 온천을 위해 나섰다. 푸닝 온천은 한국인이 개발하여 운영 중인 곳으로 1991년 피나투보 화산 폭발이후 형성된 곳이다.
온천으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이색적인 풍경이 보인다. 상의를 벗은 남자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좌우 번갈아 치며 고통스럽게 걷고 있다. 뜨거운 아스팔트길에 맨발이다. 등에는 피가 흐른다. 몇몇 아이들이 흉내 내며 뒤 따른다. 어라, 그런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여러 명이 줄을 서서 채찍 행위를 하며 걷고 있다. 필리핀만의 독특한 부활절 ‘홀리위크’ 행사 중이란다. 우리가 떠났던 4월 13일부터 20일까지 마침 필리핀은 홀리위크 연휴기간이었다.
국민 80%이상이 가톨릭을 신봉하는 필리핀인들은 가혹해 보이는 채찍질의 행위를 성스럽게 여긴다.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메고 가서 못 박힌 것을 재현하며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산페르난도 (팜팡가주) 산페드로 쿠트드 마을의 사순절 의식은 문화유산으로 간주된다.
이들의 독특한 부활절 문화는 300여 년 간의 스페인 식민지배에서 생겨난다. 스페인 식민지배 시기의 가톨릭교회는 식민사회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정치, 예술, 교육, 문학 등 삶의 모든 측면에 미친 영향력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정치적 지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식민지 이전의 전통과 가톨릭 전통을 융합하여 필리핀 자체적인 교리를 만든 이들은 성탄절에 이어 부활절을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종교행사이자 문화적 전통으로 여기며 이 기간 동안 공식 공휴일 포함하여 정부기관, 학교, 기업들 대부분이 휴무다.
1521년 무력으로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면서 미국과 일본을 거쳐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식민지배로 인한 스페인 문화와 기독교 유입은 강제노동, 착취, 토착문화와 전통 탄압으로 토착민들의 고유 신앙과 관습을 앗아간다. 식민시절 봉건적 토지 소유제도의 도입으로 소수의 부유한 가문이 토지를 독점했던 이 제도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오늘날까지도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근원으로 남아있다. 정작 스페인은 새 생명의 상징인 달걀과 맛있는 음식으로 부활절을 기념하며 즐기는데 식민 지배를 받은 필리핀은 왜 이렇게 자신을 때리고 핍박하며 못 박히는 수난 행사로 잔혹하게 부활절을 기념할까?
독립운동을 하던 대한민국과 필리핀은 같은 해에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다. 그러나 필리핀과 달리 한국은 ‘대한민국 헌법’을 공표하며 중심을 잡아 봉건제를 철폐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며 오늘에 이르렀다. 푸닝 온천 가는 길. 채찍과 달리 원주민 아이따족 아이들이 잿물 흐르는 냇가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모습도 보고, 호핑 투어도 체험하고 아픈 역사를 품은 바탄 전투 전쟁기념관과 현지 성당도 들리며 지인 덕분에 편안하게 여행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나 필리핀을 떠나오며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운 정국(政局). 국민들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때이다. /박귀상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