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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의 언어, 법률가의 언어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04-17 19:13 게재일 2025-04-1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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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라 변호사

25년 전 법대에 입학해 첫 수업으로 민법총칙이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해당 수업의 교과서는 민법서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곽윤직 교수의 “민법총칙”이었다. 법대생이 되었다는 부푼 마음으로 교과서를 펼쳤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교과서의 대부분이 한자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법전을 펼쳐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한자였다. 시간은 흘러 시험기간이 되었지만, 교과서를 이해하기는커녕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으니 큰일이었다. 옥편을 들고 고군분투하다가 급한 마음에 포항 집에 SOS를 쳤다. 

 

성경도 한자 성경만 보시던 아버지가 법대 간 딸이 혹시 시험을 망칠까 봐 걱정하시며 “민법총칙” 교과서의 시험 범위 부분을 복사해 한자 밑에다 색깔 볼펜으로 한글을 써 보내주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고 칠판에 크게 적혀있던 시험문제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法源. 이 한자 두 글자가 법대에서의 첫 시험 문제였다. 그렇게 그때는 교과서도 법전도, 법대의 수업과 시험문제도 한자가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법전의 한글화 작업이 진행되어 지금은 법학 교과서도 법전도 모두 한글로 쓰여 있다. 그러나 여전히 법률용어 중엔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는 일본식 한자 단어가 많다. 문장 면에서도 법원의 판결문들을 가만히 보면 부정문의 부정문 같은 어려운 문장이 많다. 변호사들이 쓰는 서면도 마찬가지다. 15년째 변호사 생활을 하다 보니 몸에 베인 것인지, 내 입장에선 평범하게 쓴 서면이라 생각했는데도 나중에 의뢰인으로부터 이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여전히 법률가들의 말은 일상에서 쓰는 말과 괴리가 있는가보다.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이 있었다. 이 때 헌법재판소가 낭독한 결정문에 대해 “쉬운 말로 간결하게” 쓴 “논리정연한” 명문이라는 평이 많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법원 판결문을 많이 들어봤는데 중간에 휴대폰을 한 번도 안 쳐다보고 들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또 요즘 필자는 처음으로 지인들로부터 “나도 법대 갈걸 그랬다” “자녀에게 법 공부해 보는건 어떻겠냐 제안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늘 판사, 변호사하면 AI 시대에 제일 먼저 없어질 직업 아니냐는 소리만 듣다가 이런 긍정적 이야기들을 들으니 신기하다. 며칠 전 이국종 교수의 “조선반도는 입만 터는 문과 놈들이 해 먹는 나라다. 떠나라”라는 신랄한 비판에 마음이 아팠던 터라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헌재 결정이 그나마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논리가 쉽고 편안하게 국민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리라. 헌재는 대통령 파면 결정이라는 결과물을 쉽고 간결한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내어주었고, 이에 국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받아들였다. 20년 전 한문에서 벗어나는 한 단계를 넘은 법률, 법률가의 언어는 쉽고 간결한 말과 문장으로 나아갈 두 번째 단계를 넘을 시기에 다다른 것 같다.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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