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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두드리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5-04-16 13:55 게재일 2025-04-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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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드르륵 쿵쿵, 피아노를 실은 구루마가 바닥을 훑었다. 모서리에 옆구리가 치이고 다리가 부딪혔다. 20년을 품고 있었던 피아노다. 여든 여덟 개의 건반들이 울음을 뱉어내듯 으르렁거렸다. 도살장으로 가는 소처럼 가기 싫다고 울어대는 소리 같았다. 

 

고개를 돌렸다. 사명을 다했으니 이제는 보내도 된다고 애써 마음을 다독거렸다.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지 말기를 바랐다. 손을 봐서 음악가를 꿈꾸는 가난한 누군가의 집으로 보내지길 빌었다. 텅 빈 자리를 보자 몸속 장기 하나가 빠져나간 듯 허전했다. 머릿속에는 저들과 함께 한 시간이 편집되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는 당신의 꿈을 대신해 내게 피아노를 사주었다.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면 아버지는 뭐든 들어주었다. 늦둥이인 내가 고사리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음악대학을 졸업하며 진로를 고민했다. 친정집 2층에 가건물을 지었다. 그렇게 한 대씩 늘인 피아노가 어느새 열 대가 넘었다. 아이들은 하루도 어김없이 약속된 시간에 왔다. 그 많은 건반 중에서도 자기가 연주할 곡의 위치를 잘도 찾아냈다. 어설프지만 한 곡을 완성할 때면 내 마음의 선율 위에도 동심이 무지개 톤으로 펼쳐졌다. 

 

시간이 축적되면서 아이들과의 이야기도 쌓여갔다. 친구의 장난으로 피아노 뚜껑이 닫히면서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쫓아갔던 일,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같은 멜로디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건반을 두드렸던 일, 스타카토처럼 통통 튀었던 수다와 귀에 익은 어설픈 연주는 흘러가지 않고 내 속에 고였다. 피아노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새겨졌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박혔다. 

 

피아노는 동심이 뛰어노는 언덕이었다. 그 언덕에서 나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연필을 깎아냈다. 아이들은 내가 깎아준 연필로 연습을 마칠 때마다 사과 그림에 색칠을 했다. 엇박자를 고집하는 아이와 함께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박자를 맞추었다. 비밀창고처럼 피아노 의자에 숨겨 두고 꺼내 먹던 과자는 달콤했다. 수많은 가요 악보들과 아이들의 색으로 채워둔 그림들, 동심은 내 팍팍한 삶에 맑은 웃음을 선물했다. 

 

겉으로 보면 피아노는 무심한 나무 구조물처럼 보인다. 뚜껑을 열면 하얀 건반과 검은 건반이 가지런히 대비되면서 반짝인다. 현마다 자신만의 음을 지닌 살아있는 생물이다. 속으로 우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육아로 힘들고 시댁 문제로 힘들 때 피아노는 나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피아노는 마음의 현을 망치로 두드려 희로애락을 드러낸다. 내가 내 현을 두드리면 피아노는 침묵하지 않고 언제나 바로 반응했다. 하나의 건반을 두드리면 더 크고 긴 여운으로 응답했다. 그날의 감정에 따라 나는 건반을 두드리며 내 마음속 파도의 수위를 조절했다. 건반을 두드리고 현이 울면 내 속에 음표는 공중으로 떠갔고 내 기분에 따라 안단테가 되었다가 비바체가 되었다. 내 감정의 북소리가 요동을 칠 때마다 나는 피아노 소리에 음정을 맞췄다.

 

내가 두드린 것은 피아노가 아니라 내 마음의 현이었다. 현의 장력을 조율하듯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의 현을 두드리면 내가 연주되었다. 삶의 다양한 음역대音域帶를 지났다. 팽팽해서 건들기만 해도 탱탱하게 반응하던 20대, 삶과 싸우며 희로애락을 넘나드느라 출렁거리던 청년기, 지금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 고개를 이순耳順으로 가고 있다. 귀가 순해지면서 가끔은 내 안을 두드려본다. 

 

삶의 장력도 오래된 피아노 줄처럼 느슨해졌다. 누가 나를 건들어도 반응이 가볍고 어디를 가도 걸음이 느긋해진다. 가끔 내 안의 현들을 바투 당겨보지만 이내 풀어지고 만다. 낡아간다고 생각하면 문득 서글프지만, 여유가 생겼다고 여기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무심코 즉흥환상곡을 연주한다. 이는 편안한 음역대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사주신 피아노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 앞에 앉아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린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유년의 음표들을 날린다. 힐끗 거울을 보니 중년의 내가 여덟 살의 나를 두드리고 있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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