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사람들의 거처이자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세계 속에서 머물며, 꿈을 꾸고 사랑하며,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 비로소 의미로 나타나기에, 대화는 언어라는 집으로의 상호 초대이다. 그런데 그 파티가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소리 내어 읽어보자! “저는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봤고,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진실을 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 문장 더 읽어보자! “이 고난은 하늘이 당신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이겨내면 분명 더 큰 축복이 올 겁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시라. 깊이 생각하는 척하는, 뭔가 있을 듯한 아무말 대잔치! 즉 ‘개소리’다.
거짓말 조차도 이것 앞에선 작아진다. 개소리! 진실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가짜 면허증을 부여받은 말장난. 그렇다. 개소리는 말장난이다. 그런데 매우 나쁜 것이 문제다.‘소리’라는 글자 앞에 붙은 ‘개’가 무슨 죄가 있으랴. 개소리는, 개보다 더 못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
‘개소리에 관하여(On Bullshit)’의 저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개소리는 진실이나 거짓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말”이라 정의한다. 개소리 꾼은 자신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한 관심이 없다. 개소리 꾼의 목적은 사실의 전달이 아니다.‘설득’‘이미지 관리’‘주목받기’등을 위한 ‘인상조작(impression management)’이 그 목적이다. 거짓말은 진실을 전제로 하지만, 개소리는 진실을 전제하지 않는다. 개소리는 처음부터 진실에 기반하지 않으므로,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 개소리를 지껄이는 자는, 양심의 가책은 고사하고 의기양양이라는 파렴치 범죄까지 추가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거짓말쟁이는 진실을 존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개소리 꾼은 처음부터 진실에 무관심하다. 개소리에는 소위 ‘진리값(양심의 가책)’이 없다.
거짓말과 개소리 중간에 ‘협잡’이 있다. 협잡은, 상대를 속이려는 의도는 있으나, 말 자체가 명확히 거짓은 아닌 경우다. 예를 들어, 광고문구 ‘이 제품은 당신을 바꿉니다’라는 말을 보라. 부분적 왜곡이거나 뻔뻔한 과장이다. 이렇듯 협잡은 듣는 이의 믿음을 이용하여 이득을 노린다.‘거짓말-협잡-개소리’의 순서로 점점 더 악이 가중된다.
거짓말이 최고로 나쁜 말이라 알았던 우리에게 충격적인 순서가 아닌가! 거짓말은 진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두려움)이라도 있지만, 개소리는 이것에 관심조차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정치인’. ‘SNS 정보’, ‘광고언어’, ‘이념에 도취된 떠벌이들’은 대표적 개소리 생산공장이다.
진실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사랑도 민주주의도 없다. ‘아는 것이 없을 때 침묵하는 태도’‘진실에 대한 집요한 관심’‘비판적 사고’는 개소리라는 병을 낫게 하는 약이다. 개소리로 포장된 사람은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유의하자. 얼마나 많이 개소리에 속았던가! 얼마나 많이 개소리를 지껄여 왔던가! 우리는 말에 중독되어 있으면서도, 말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서글프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