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에는 꽃과 향수의 도시가 있다. 낡고 오래된 도시지만 도시 곳곳에 향기가 뿜어나는 매혹적인 도시 그라스. 그라스(Grasse)는 프랑스 향수 산업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향수의 수도이기도 하다. 특히 그라스의 재스민은 세계적인 향수 샤넬 N°5의 주원료로 쓰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라스는 파트릭 쥐스킨트(Patrick Süskind)의 소설 ‘향수’(Das Parfum) 속 배경 도시로 등장하며 유명세를 더했다. 향수의 도시답게 장미, 오렌지꽃, 재스민, 라벤더, 미모사 등의 꽃들이 화려하게 도시를 장식한다. 그라스에도 봄이 왔다.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는 그라스로 봄꽃여행을 떠나보자.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배경이자
샤넬 ‘N°5’의 고향인 프랑스의 고풍스러운 도시
화가의 팔레트 옮겨 놓은 듯한 골목길 걷다보면
장미·라벤더·재스민… 강렬한 꽃향 코끝 스쳐
디지털시대, 아날로그적 경험과 낭만을 찾아서
□ 피치퍼즈? 모카무스? 다양한 색이 어울리는 도시
프랑스의 그라스를 색으로 표현하면 어떤 색이 어울릴까?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색상 연구·개발 기업 팬톤(PANTONE)이 지정한 2024년 컬러는 ‘피치퍼즈’(Peach Fuzz)였다. 자연스럽고 따뜻한 복숭아빛을 닮은 색이다. 그라스는 피치퍼즈 컬러를 연상시키는 친근하고 부드러운 색감의 집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도시다. 팬톤이 지정한 2025년 컬러는 모카무스(Mocha Mousse)다. 부드러운 초콜릿과 따뜻한 커피톤이 조화된 색상이다. 그라스의 골목길을 걸으면 모카무스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예술가에게 던져진 환상적인 팔레트 같은 곳이라고 해야 하나.
가죽에 향을 입히기 위해 발전해 온 향수의 전통(Heritage)이 살아 숨 쉬는 그라스는 나의 상상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린다.
그라스에 오면, 파트릭 쥐스킨트가 쓴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Das Parfum: die Geschichte eines Moerders)가 떠오른다. 18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향수 제작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살인마 장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e Grenouille)의 이야기를 다룬 향수의 실제 무대가 그라스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른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이 그라스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라스의 모든 곳에 향수가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재스민과 장미의 달콤한 향기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 했을까? 그의 어두운 탐구는 그라스의 밤하늘을 은은히 물들인다. 향기의 정수를 찾아 방황하던 그의 이야기는 그라스의 고풍스러운 풍경 속에 숨겨진 비밀로 남아 있다.
나는 그루누이를 찾아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다. 그가 걸었을 낡고 음침한 그 길을 얼마나 헤맸을까? 마침내 그와 마주친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필름에 담는다. 뷰파인더를 볼 여유도 없이 셔터를 누른다. 사진은 찰나의 순간에, 우연히 이루어지는 감각적 상상의 창조물이기에, 나는 사진이 좋다.
□ 회화와 사진 결합한 사진작가 샤를 네그르
그라스에 오면, 또 생각나는 사람은 프랑스의 초기 사진작가 샤를 네그르(Charles Nègre)다.
고풍스러운 중세도시 그라스에서 눈에 띄는 흰색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샤를 네그르 미디어 도서관(Médiathèque Charles Nègre)이다. 이 건물은 주변의 전통적인 건축물들과는 대조적으로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하얀 직선과 날카로운 모서리가 그라스의 부드럽고 따뜻한 색조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처음 이 건물을 보았을 때, 나는 이질적인 특별함을 느꼈다. 마치 오래된 예술작품 속에 불쑥 끼어든 현대미술 조각처럼.
이 도서관에 이름을 내어준 샤를 네그르는 그라스 출신의 초기 사진작가로, 회화와 사진을 결합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초기 사진예술의 경계를 확장시킨 혁신적인 예술가다. 그의 작업은 사회적 현실과 인식을 포착하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와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다.
수년 전, 나는 게티 미술관(J. Paul Getty Museum)에서 ‘샤를 네그르’ 컬렉션을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사진 속 인물들의 눈빛, 고요한 풍경의 디테일, 그리고 건축물의 웅장함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그 시대의 숨결과 예술가의 혼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 샤넬 N°5의 주원료가 생산되는 향수의 도시
전 세계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향수인 샤넬 N°5의 주원료인 메이로즈와 자스민이 이곳 그라스에서 엄격하게 재배된다. 메이로즈가 만개하는 5월과 재스민 축제가 열리는 8월은 그라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 꼽힌다. 장미와 재스민 같은 향수의 원료가 되는 꽃들은 강렬한 향기를 뿜어내지만, 그 향기는 단 몇 시간 안에 사라지기 때문에 해가 뜨는 이른 아침에만 수확해야 한다. 그 순간에만 꽃에서 가장 진하고 순수한 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 라벤더, 재스민, 오렌지 블라썸, 그리고 야생 미모사 같은 향기로운 꽃들을 자연과 함께 재배해 온 그라스 사람들. 향기로운 역사를 이어오고, 이를 산업으로 발전시켜온 그들의 끈기와 정성은 놀랍고도 인상 깊다. 남프랑스의 따스한 햇살과 풍요로운 토양이 주는 여유로움 속에서, 그라스 사람들의 향수에 대한 강박적인 집념은 역설적인 뉘앙스 차이로 다가온다.
그라스는 ‘향수의 고장’에 걸맞게 프라고나르(Fragonard), 갈리마르(Galimard), 몰리나르(Molinard)와 같은 대표적인 향수제조소(Perfumery)들을 품고 있다. 이들은 17세기경 처음 개발된 추출법, 증류법, 그리고 포르말린법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 세대에 걸쳐 향수를 생산해왔다.
그라스 도심에 있는 프라고나르 향수 공장을 방문하면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향수 공방에서는 나만의 개성이 담긴 향수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으며, 1층에 있는 향수 박물관에서는 전통적인 향수 제조 과정을 견학할 수 있다. 또한, 박물관에는 그라스 출신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작품 13점이 전시되어 있어 예술적 감동도 함께 느낄 수 있다.
□ 향으로 깨어나는 기억과 감정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취향과 존재를 가장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향기’다. 은유적이면서도 매혹적인 향기는 마치 ‘신분증’처럼 강렬하게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감각 중 향기만큼 강렬한 것이 또 있을까? 향기는 우리의 기억과 감정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원하는 감각을 섬세하게 자극한다.
나는 향수를 선택할 때 향에 담긴 추억과 감성을 스토리로 함께 경험하는 걸 좋아해서, 프랑스 자연주의 니치(Niche) 향수 브랜드 ‘오르메(ORMAIE)’를 애용한다. 예를 들어, 창업자 밥티스트(Baptiste)가 프로방스에서 함께한 아버지를 추억하며 만든 라벤더 향 ‘르 파상(Le Passant)’이나,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무용수의 향을 표현한 ‘토이토이토이(TOI TOI TOI)’처럼 시적이고 인문학적인 요소가 담긴 향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추억하게 해준다.
‘뱅트위트 데그레(Vingt-Huit Degrés)’는 프랑스 남부의 여름밤 튜베로즈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향수로, 산책하기 좋은 온도인 28도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이 향수의 보틀캡(병뚜껑)은 여름에 쓰는 흰색 모자를 연상시키는데, 프랑스 시인 랭보(Arthur Rimbaud)의 시 구절 ‘여름의 하얀 태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니 재치와 발랄함이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세상을 바꾸는 발랄함을 사랑한다.
그라스의 곳곳에 스며든 향취는 로맨티시즘이 점점 사라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감각이며, 디지털화가 깊어질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아날로그적 경험이기도 하다. 고전적이면서도 친숙한 장미는 오랫동안 수많은 의미로 사랑받아 왔지만, 때로는 진부한 ‘클리셰(Cliché)’처럼 굳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혹적인 장미의 섬세한 꽃잎을 어루만지며 내 안의 로맨스를 떠올려보고 싶다. 그라스의 향기 속에서, 클리셰가 되버린 내 안의 감성을 일깨운다.
/글·사진 김범 여행작가
/정리=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