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산책길에 나섰다가 홀연 찾아든 생각이 있다. ‘전도서’ 1장 2절이다.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사노라면 누구나 몇 번씩 겪는 허망함이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이다. 허망함의 원인은 개별자에게 고유한 것이어서, 그것을 특정 영역이나 대상으로 한정함은 불가능하다.
하기야 아까 낮에 보았던 싸움 장면도 원인 제공자 가운데 하나일 터다. 어제 내가 정리한 옆집 공터에서 두 마리 고양이와 두 자 남짓한 뱀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있었던 게다. 어지러운 낙엽과 작은 나뭇가지들 때문에 뱀의 형상은 잘 보이지 않았으되, 고양이가 보여주는 날카롭고 치명적인 발놀림에서 공격 대상이 뱀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자명한 것이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뱀에게 들이닥친 고양이의 급습은 가공(可恐)할 만한 것이었으리라.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한 채 30여 분만에 뱀은 축 늘어져 버렸다. 뱀의 사체를 장난감처럼 들었다 놨다 하면서 고양이는 전리품을 한껏 자랑하는 눈치였다. 경칩 지난 지 사흘 만에 불귀의 객이 된 뱀에게 불시에 찾아든 사신(死神)을 어찌하겠는가?!
지난주 개강한 대학의 교정은 활기에 넘쳤으나, 반갑게 대면한 교수의 전언(傳言)은 우울했다. 2월 한 달 새에 세 분의 집안 어른을 잃었다는 것이다. 친가와 외가의 두 삼촌과 부친을 연이어 멀리 떠나보냈으니, 그 심사를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20대 청춘들의 활기와 명랑한 태도를 노년과 상가(喪家)의 우울하고 처연한 분위기와 병립시키기 자못 어려웠다.
한쪽에는 생을 구가하는 살아남은 자들이 있고, 맞은 편에는 죽음과 대면하는 자들이 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 행운과 불운, 얻음과 잃음, 건강과 질병, 웃음과 눈물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음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단맛만 추구하는 인간의 심사에는 쓰고 거친 맛은 자리하지 못한다. 단선적이고 단편적인 주관에 저 스스로 갇혀버리는 까닭이다.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타자들과 맺은 관계와 인연 안에서만 존립 근거를 가질 뿐이다. 이탈리아 양자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나가르주나(용수)를 인용한 대목을 보자.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178쪽)
여기서 용수가 말하는 사물의 범주는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것에 확대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이 애지중지하는 자아와 그를 둘러싼 인간들과 그 관계를 들여다보면 사태의 핵심이 분명해진다. ‘나’를 독자적이며 지극히 가치 있는 유일자(唯一者)로 규정할 방도가 어디 있는가?! 내가 존재하도록 원인을 제공해준 부모와 형제와 아내와 남편과 자식을 잠시 돌이켜 보시라!
허망하고 쓸쓸하며 괴로운 지경에 처해 있다면, 그 배후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대척적인 존재와 가치를 깊이 묵상했으면 한다. 빛과 그림자, 있음과 없음, 길고 짧음, 선과 악의 상호 보완성에 우리의 사유와 인식이 미친다면, 삶은 그렇게 허망하거나 헛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