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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여성의 가르침

등록일 2025-02-23 19:36 게재일 2025-02-2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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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오랜 세월 내가 해온 일이라고는 책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글 쓰고, 여러 사람과 토론한 것이 전부다. 나의 독서 범위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영역까지 다채롭다. 특정 분야에 제한된 독서와 작별한 지 오래다. 그것은 나의 지나친 지적(知的) 욕구에서 비롯되거나,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대단한 독서가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40대 후반에 논어를 읽다가 ‘더 일찍 논어를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한 적이 있다. 만약 30대에 논어를 필두로 한 동양 고전과 만났더라면, 인생 항로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 같다. 하지만 러시아문학과 동서양 희곡 연구를 필생의 과제로 여기고 달려온 인생살이는 그런 가능성을 일축해버렸고,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논어를 만났던 게다.

논어를 여러 차례 숙독하면서 경탄한 대목이 여럿 있지만, 나이 들수록 와닿는 구절 하나가 ‘불치하문(不恥下問)’이다.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모르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걸 감추려 드는 짓이 부끄러운 노릇임을 강조한다.

지난해 12월 11일 부산에서 열린 탄핵 집회에서 울려 퍼진 젊은 여성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자신을 노래방 도우미라고 소개한 그녀는 휴대전화에 기록해온 내용을 차분하되 열렬하게 읽어내려감으로써 수많은 청중의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았다. 그이가 조리 있게 전개한 논지의 핵심은 주변의 소외된 시민들과 정치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20∼30대 남성들과 70대 이상 노인들이 탄핵 국면에서 어째서 내란 세력에 동조하는지를 물으면서, 그녀는 시민교육과 적절한 공동체의 부재를 원인으로 제시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젊은 남성 세대와 70대 이상 고령층의 동조(同調) 현상이 현저하다. 큰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세대와 조카나 손자의 동조 현상은 매우 이례적(異例的)이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으로 표현되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여성 우대정책과 남성의 군 가산점 폐지가 맞물리면서 양성 대결로 번진 기억이 새롭다. 껍데기만 남은 여성가족부의 심란한 현주소와 군 가산점 제도를 부활하려는 일부 정치인들의 시도로 양자의 대립 양상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이런 문제가 슬기롭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젊은 양성의 공존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날이면 날마다 청춘과 그 육신을 찬미하는 우리 사회의 상업적인 풍토 역시 고령층의 소외와 고립을 심화하는 주범 가운데 하나다. 평생교육이라는 국가과제는 뒷전이고, 가진 자들만을 위한 부자 감세와 각종 혜택으로 밀려난 도시빈민과 농어촌 거주 노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문화와 예술 그리고 교육 공동체로 끌어들이려는 의지는 어디서고 찾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그녀는 정치와 소외된 계층을 향한 관심을 아프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녀의 경이로운 연설을 들으며 깨우치는 바 있었다. 나이 든 내가 생각지 못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한 그녀에게 ‘불치하문’의 교훈을 얻은 게다. 고마운 인사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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