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버스타고 출근한다. 어젯밤, 퇴근 후 지인들과 늦게까지 술자리를 즐긴 탓이다. 이미 출근시간은 늦었고, 버스는 한산하다. 내 차로 십오 분이면 도착할 사무실이 삼십 분이 지나도 아직 한참 더 가야 할 것 같다. 버스가 중앙시장에 정차했다. 시장의 아침은 번잡한데 버스에 오르는 이가 없다. 바쁜 내 마음과는 달리 운전기사는 문을 열어둔 채 정류장을 내다보고 있다.
검정비닐봉지를 든 백발의 할머니가 힘겹게 버스에 오른다. 한 발 오르고 다시 또 다른 발을 올린다. 걷는 걸음마다 바라보는 내가 숨이 찬다.
“잠시만 잠시만요, 기사양반 내가 앉거든 출발 하세이”
손잡이를 꽉 움켜잡은 할머니가 당부한다. 계단에 발을 올리면서부터 운전석 바로 뒤의 의자까지 한 발자국씩 내 딛는 걸음걸이가 빙판길을 걷는 것 같다. 서너 발자국이면 닿을 거리가 멀기만 하다. 겨우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손에 든 검정비닐봉지를 발치에 놓는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할머니가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란 운전기사가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손가방이 없어졌다며 빈손을 들어 허둥거렸다. 운전기사가 황급히 핸드브레이크를 당겼다. 그는 할머니에게 가만히 앉아있으라는 말을 연거푸 내뱉으며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고, 정류장 의자 밑까지 가방을 찾아보는 그를 내다보았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있었다며 검정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헤쳐 보았다. 작은 손가방을 발견한 그녀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했다.
나는 못 본 척 눈을 반쯤 감고 있는데, 내 뒷좌석에 앉은 남자가 쥐어박을 듯이 혀를 찼다. 할머니가 차에 오를 때부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연신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혀를 찼던 남자다. 마지막 ‘에잉!’까지 따라붙는 남자의 말투에 속이 뒤틀렸지만, 어떤 사람인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 할머니의 모습이 나의 내일인 것 같은데 혀까지 찰 일인가.
얼마 전, 친구와 시골길을 걸었다. 추수를 끝낸 들판은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햇볕이 모인 논둑 밑에 한 무더기의 들국화가 보였다. 소담스러운 모습을 지나칠 수 없었다. 쪼그리고 앉아 내려보다가, 서리라도 내리면 시들어버릴 들국화에 욕심이 생겼다. 치맛자락을 모아 움켜쥐고 조심스레 내려가려 하자, 친구가 나잇값을 하라고 했다. 괜히 엎어지는 불상사를 만들지 말라는 말에 나는 바지만 입었다면 폴짝 뛰어내릴 수도 있다고 장담했다. 큼지막한 돌을 밟고 내려가면 될 것 같아 살짝 왼발을 내렸다. 몸의 무게가 오른 다리에 실리자 무릎이 시큰거렸다. 삼십 몇 년 전에 다쳤던 무릎이 요즘 말썽이다. 불편한 발을 먼저 내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오른 발끝이 돌에 닿는 순간이었다.
나는 논바닥에 가오리 엎어놓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의 경로는 기억에 없다. 왜 넘어졌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천천히 가고 있었다. 논바닥에 뺨을 붙인 채 일어서지를 못했다. 친구의 부축에 겨우 일어난 나는 비틀어진 안경보다 얼얼한 오른쪽 광대뼈에 먼저 손이 갔다. 얼굴에 상처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긁힌 무릎에 붙은 흙을 쓸어내리며 논둑을 쳐다보았다. 저 높이에 내가? 허방을 짚은 것도 아닌데?
치맛자락에 도깨비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친구는 가시를 떼어내며 걱정스레 살폈다. 바위를 이리 저리 뛰어넘으며 산을 오르던 순발력은 이미 나를 떠나고 없었다. 몸은 세월의 눈금만큼 정확하게 가고 있는데, 내 마음은 그 몸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젠 우리 나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친구의 말이 유리조각이 되어 가슴에 빗금을 그은 날이었다.
버스가 서자, 혀를 차던 남자가 일어섰다. 나는 눈을 지그시 뜨고 그 남자를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정수리가 휑한 그도 한발 내리고 또 한 발 옮긴다. 창밖을 내다보니 굽은 등이 허정거리며 가고 있다. 내 눈길이 따라간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하자, 갑자기 그가 돌아서서 허우적거리며 뛰어왔다. 장갑 한 짝을 든 손을 휘휘 저으며 ‘장갑, 장갑’이라고 외쳤다. 뒤돌아보니 그가 앉았던 자리에 한 짝이 놓여있다. 던져줄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버스가 천천히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