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역사’<br/> 피터 버크 지음<br/>한국경제신문 펴냄·인문
모든 시대는 자신들의 시대가 이전 시대보다 지식이 더 풍부하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시대를 암흑의 시대로 보았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미신을 이성으로 쓸어버리려고 노력했으며, 근대 국가는 무지(無知)라는 거인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그리고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 우리는 정말 과거 인류보다 덜 무지한 걸까? ‘문화 혼종성’, ‘폴리매스’, ‘지식의 사회사’ 등을 통해 전 세계 수백만 독자를 사로잡았던 이 시대 최고의 지성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종신 석학교수 피터 버크가 인류의 무지 역사를 탐구하는 새로운 책 ‘무지의 역사’(한국경제신문)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종교와 과학, 전쟁과 정치, 비즈니스와 재난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무지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특히 과거 흑사병부터 현재 기후 변화에 이르기까지 무지를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다루며, 각 시대와 사회에서 무지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됐으며 심지어는 특정 목적을 위해 활용됐는지 설명한다. 무지는 전염병에서 전쟁과 기근, 제국의 붕괴에서 금융 시스템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지는 대중의 지식 부재가 원인인 것도 있지만, 지배 계급이 대중을 통제하거나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정보를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왜곡한 사례도 수없이 많다. 피터 버크는 이와 관련해 풍부한 사례를 들며 지적 여정을 진행해 간다.
1부에서는 무지의 개념 정의와 무지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돼왔는지 살펴보고, 종교와 과학, 지리학에서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2부에서는 전쟁, 비즈니스, 정치를 비롯해 환경, 기후, 산업 전반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무지의 근본적인 역할과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에 개인이 무지했던 가장 큰 이유는 사회에 유통되는 정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일부 지식은 필사본에 기록돼 숨겨졌고, 교회나 국가의 공개 거부로 지금까지 감춰져 있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에는 정보의 홍수 속에 개인은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선택할 수 없게 되는데, 이런 상태를 ‘필터링 실패’라고도 한다. 결국 정보화 시대는 지식 못지않게 무지도 확산시키고 있다.
피터 버크는 모든 시대가 무지의 시대라고 해야 겸손할 뿐 아니라 정확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지난 두 세기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집단 지식이 대다수 개인의 지식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조상보다 조금 더 알 뿐이다. 둘째, 새로운 지식이 확산되면 다른 지식은 사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계적 언어 습득이 증가함에 따라 다른 언어의 소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현재 7000여 개에 달하는 지구촌 언어 중 50~90퍼센트는 2100년 이전에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존 지역에 사는 부족처럼 소규모 부족의 노인들이 죽으면 구전되던 언어와 지혜가 그들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셋째, 최근 수십 년 동안 정보의 양이 급속하게 늘기는 했지만, 이는 엄연히 지식의 증가와는 다르다. 지식 증가는 정보와 달리 검증, 소화, 분류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지에 대해 막연했던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고, 지식의 본질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 또한 과거의 무지가 오늘날 우리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점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며, 새로운 지식과 함께 발생할 새로운 무지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철학적인 고찰을 제공한다. /윤희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