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여유로운 휴일 오후, 한가로이 고무신을 끌며 뒤뜰과 텃밭 주변을 거닐다가 문득 들려오고 눈길 가는 곳을 응시하게 됐다. 새들의 밀어 같은 재잘거림이 사방에서 들리고, 아직은 푸릇한 감나무 잎새 사이로 조금씩 익어가는 주홍빛 감이 보일 듯 말 듯한 곳에서 몇 마리의 새들이 포르릉 날갯짓하다가 나뭇가지에 앉아서 홍시가 된 감들을 쪼아대고 있었다. 수년 전부터 그렇게 찾아온 새들이 올해도 용케 찾아와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으니, 반갑기도 하고 기특하게만(?) 여겨졌다. 넌지시 그러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폰카메라에 담기도 하는 등 내심 회상에 젖어 들기도 했었다.
새들이 날아들며 감홍시를 쪼아대고 들판에서 모이를 찾는 걸 보니 정녕 가을이 깊어 가는가 보다. 불과 한 달 전쯤만 해도 청청하기만 하던 산야의 초목이 누렇게 바래고 들판에서는 황금물결이 일렁이니, 농사력(農事曆)으로는 이 시기에 추수를 마무리하고 겨울맞이를 준비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즉,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국화도 활짝 피는 늦가을로 접어들어, 낮으로는 가을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지만 밤의 기온이 낮아져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무렵이다.
유년시절의 가을은 언제나 감나무에서 시작됐던 것 같다. 고향집과 불과 50여미터 떨어진 할아버지 집 뒤로는 아름드리 감나무 10여 그루가 키재기 하듯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불그스레하게 감나무 잎이 물들어 떨어지면 뒤란에 수북하게 쌓여서 마치 ‘낙엽 이불’처럼 푹신하고 매끄럽기도 했었다. 땔감이 넉넉하지 않으면 감잎을 쓸어 모아 불쏘시개로 쓰기도 하고, 부러진 감나무 가지는 한데 모아 쇠죽을 끓일 때 지피기도 했었다. 그리고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는 일은 거의 다 필자가 도맡아 했었는데, 10여미터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마을 풍경을 내려다보며 거의 새들만 쪼아먹던 말랑말랑한 주홍빛 홍시를 통째로 입에 삼키는 그 맛은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별처럼 뜬 감꽃이 뒤란에 떨어지면/실에 꿴 감꽃 목걸이 걸고 으쓱이며 들썩이다/어느새 배고파지면 입에 넣던 꽃잎들//암록(暗綠)의 잎새 바람 간간이 불어와도/감꽃은 푸르탱탱 땡감으로 자라나/떫어도 움켜잡으며 비바람을 견뎠지//청록의 감잎들의 불그스레 수런대고/하늘빛 닮아가며 별빛 꿈을 꾸다가/마침내 가지마다 켜지는 주홍빛 선물인가’ ㅡ拙시조 ‘감빛 서정’ 전문
모든 것이 서툴고 어설퍼 야단 맞고 초조해하며 떨떠름하던 땡감 같은 시절이 지나면, 비바람 모진 서리 맞으며 잉태해온 주홍빛 속살이 말랑해져서 연시가 되거나 더욱 단단해져서 건시(곶감)가 되어 특유의 단맛과 빛깔을 띄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땡감마냥 푸르탱탱한 패기와 의욕으로 청년시절을 보내고, 하나씩 털고 버릴 것은 거두고 내면을 채워 숙성의 농밀함으로 익어가는 중장년의 여울에서 감빛 마냥 은은하게 빛나며 먼 하늘을 응시하지 않을까 싶다. 연신 홍시를 쪼아대며 사이좋게 나눠 먹는 새들이 정겹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