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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앞에서

등록일 2024-10-16 18:25 게재일 2024-10-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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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희 수필가
윤명희 수필가

도서관 유리문을 밀고 나오다 멈췄다. 책 한권 빌려서 나오는 사이에 온 세상이 비에 젖었다. 우산은 차에 있고, 차는 주차장 끄트머리 나무 밑에 있다.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굵다. 양철지붕 위를 우다닥 뛰어다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던 옛 시간들이 지나간다.

내 나이 열두 살 즈음 우리 집에는 교과서 외에는 책이 없었다. 읽을거리가 있는 만화방 앞을 기웃거리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생기는 용돈으로 1편을 보고, 또 기다려 겨우 2편을 보고나면 그 다음 편이 보고 싶어 갈급증이 났다. 나는 직접 노트에 다음 편 만화를 이어 그리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만화를 그리다 선생님께 들켰다. 노트도 뺏기고, 손바닥까지 맞았다. 세상 무너진 표정을 한 내게 친구가 자기 집에 가서 같이 숙제하자고 했다. 친구네는 서부정류장 옆에 큰 식당을 했다. 식당은 늘 손님으로 북적여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같이 공부할 거라는 친구의 말에 그녀의 엄마가 간식을 챙겨 주었다. 간식을 받아들고 방으로 들어가던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방의 한 벽면이 소공녀, 홍당무, 빨강머리 앤 등으로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친구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친구네로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식당 문틈 사이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친구야! 학교가자”

한참 후, 잠옷 바람으로 나오는 그녀 뒤로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라는 엄마의 말이 따라 나왔다.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방에 들어갔다. 그녀가 씻고 밥 먹을 동안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빠르게 책을 읽어내려 갔다. 학교 가야 할 시간은 여지없이 다가왔다. 미처 다 읽지 못한 빨강머리 앤을 빌려 가방에 넣었다. 방을 나서기 전, 내일 읽을 ‘소공녀’를 눈으로 찜했다.

다음날, 읽은 책을 꽂아두고 어제 찜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한 몸이 되어 책 속을 돌아다녔다. 가방을 챙기던 친구가 내게 재밌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 장이라도 더 읽을 욕심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매일 매일이 즐거운 나와는 달리 그녀는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져갔다. 그녀가 나 때문에 엄마에게 혼나는 일이 잦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모른 척 하려했다. 숙제를 끝내자, 친구가 내일부터는 따로 학교 가자고 했다. 마저 읽지 못한 책들을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했다.

다시 만화방 앞을 기웃거리다, 만화책을 한 아름 빌려 가는 이웃집 오빠를 보았다. 그는 옆집 아저씨의 먼 친척뻘 되는 조카인데,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저씨를 도와 목재소에서 잡일을 했다. 그가 내게 슬쩍 다가와 저녁밥 먹고 오면 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목재소 쪽문으로 사라지는 만화책을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식구들 몰래 대문을 나섰다. 목재소 쪽문을 두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책을 달라고 손을 내밀자, 그가 사무실 옆에 있는 쪽방을 눈짓했다. 책을 다 가져가라는 말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방에 들어가 한 아름 안고 나왔다. 방문을 나서자, 그가 가쁜 숨을 쉬며 다가왔다. 놀란 나는 책을 그의 얼굴을 향해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온 몸에 열을 뿜어냈다. 밤새 앓았다. 열이 내리면서 만화방으로 가던 길이 내겐 없어졌다.

늘 허기졌던 책에 대한 열망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봇물이 터졌다. 방과 후,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2층 도서관으로 갔다. 책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은 후, 마치 조갈증 환자처럼 활자를 마시듯이 읽었다. 데미안을 읽으며 알에서 깨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동경했다. 폭풍의 언덕에서 히디클리프의 사랑에 매료되었다. 집에서 학교 가는 길이 전부였던 내 시각이 책 속을 헤매고 다녔다.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어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느꼈다. 내 안의 출렁거림을 가라앉히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도 언제나 책 속의 길에서 가능했다.

사는 일에 치이는 가운데서도 나는 활자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인연을 따라 걷고 걸어, 지금 도서관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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