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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만죽재·해우당고택 국가문화유산 지정 예고

김세동기자
등록일 2024-10-07 20:00 게재일 2024-10-08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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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가옥 배치·원형 잘 보존<br/>고문헌·서화·글씨도 다수 전승
영주 만죽재 고택. /국가유산청 제공

국가유산청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의 집성촌으로서 유서 깊은 전통마을 영주 무섬마을 내 대표 고택 만죽재고택, 해우당고택과 생활유물들을 각각 국가민속문화유산 ‘영주 만죽재·해우당 고택 및 유물 일괄’로 지정 예고했다고 7일 밝혔다.

만죽재고택은 조선시대 병자호란 이후 1666년 반남박씨 박수(1641∼1729)가 무섬마을에 와서 지은 집이다. 마을을 맨 먼저 개척해 정착한 조상부터 13대까지 장손이 360년간 집터와 가옥을 온전히 지켜오고 있다. 집터와 가옥의 배치와 평면, 주변 환경이 큰 변형 없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고택은 안채, 사랑채, 부속채 등이 연결된 ‘ㅁ’ 자형의 주택이다.

국가유산청은 고택의 ‘ㅁ’자형 평면 형태는 조선 중·후기 상류주택을 대표하는 유교적 종법질서의 표현 방법으로서 중요한 건축적 특징이 있다고 평가했다.

만죽재 고택에는 옛 생활과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남아있다.

전통혼례를 치를 때 신랑 집안에서 신부 집안에 보내는 혼인 문서인 혼서지(婚書紙)를 비롯해 호주가 호(戶·집)의 상황을 적어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등이 잘 보관돼 있다.

명성황후가 1895년 10월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 후 영남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 기록을 필사한 항일격문집, 만죽재에 전승돼 온 내방가사를 모은 문집 등도 있다.

영주 해우당 고택.  /국가유산청 제공
영주 해우당 고택. /국가유산청 제공

‘관직도표’를 그려놓고 주사위를 던져 숫자에 따라 말을 놓고 가장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인 승경도(陞卿圖) 관련 자료도 있어 당대 생활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

해우당 고택은 선성김씨 집안에서 마을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 김대(1732∼1809)의 손자 김영각(1809∼1876)이 1800년대 초반에 지은 집이다.

그의 아들인 해우당 김낙풍(1825∼1900)이 1877∼1879년에 고택을 수리한 이후 해체하거나 수리한 적이 없어 150년 가까이 원형이 잘 보존돼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낙풍은 고종(재위 1863∼1907)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친구로, 현재 사랑채에 걸려있는 ‘해우당’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쓴 친필로 알려져 있다.

해우당 고택 역시 ‘ㅁ’ 자형으로 돼 있다.

국가유산청은 “안방에서 태어나서 목방, 작은사랑, 큰사랑 등으로 옮겨가는 생애주기와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해우당 고택 역시 여러 고문헌과 서화, 글씨 등이 전한다.

김낙풍이 작성한 과거 답안지, 집 건물을 수호한다는 성주를 모셔두는 단지, 갓 보관함 등도 남아 있어 ‘영주 해우당 고택 및 유물 일괄’로 함께 지정 예고됐다.

국가유산청은 약 1달간 각계 의견을 들은 뒤, 문화유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영주 만죽재 고택 및 유물 일괄’ 등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확정한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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