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지루하던 더위를 깡그리 밀어내기라도 하듯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간간이 산허리까지 안개가 내려와 비 오는 날의 운치를 더하고, 흠뻑 젖은 솔숲에서는 빗줄기와 어우러진 솔내음이 차분하게 깔리는 듯했다. 송림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서원(書院) 기와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마냥 또렷하고 정겨운 해설사의 설명을 툇마루에 걸터앉아 듣고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진지하게만 보였다.
이와 같은 장면은 국가유산청의 2024년 세계유산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열리는 ‘소수서원 필리아’의 한 부분이다. ‘세계유산 활용사업’은 국가대표 브랜드로서의 세계유산 가치의 보존 및 전승, 융복합적 활용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기획된 사업으로, 영주시에서는 국가유산청의 2024년 공모사업에 ‘소수서원 필리아’ 등 2건이 선정됐다. 동양대학교 한국선비연구원에서 주관하는 ‘소수서원 필리아’는 일상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의 심신을 힐링하면서 선조들의 지혜를 느끼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총 10회에 걸쳐 소수서원과 선비촌 일원에서 개최되고 있다.
해설사와 함께하는 소수서원 탐방을 시작으로 내 몸을 행복하게 하는 치유음식 특강과 청국장 영양식단이 나오고, 꿈결같이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는 소수서원의 솔숲에서 해금과 거문고의 그윽한 선율이 흐르면 지나가던 바람조차 멈추고 풀벌레들의 청아한 합창이 추임새를 더하며 여흥을 돋우기도 한다. 그리고 여명 속에서 서광을 맞이하는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는 아침에 다향을 맡으며 차훈(茶熏)명상을 하고 나면, 그야말로 심신의 평온함과 안정감이 얼굴에 쓰여 질 정도로 개운하고 여유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필리아(Philia)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행위나 증세’ 등을 뜻하는 영어 접미어로 우애 또는 형제애로 옮겨진다. 즉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한 바람이 쌍방적으로 상호 간에 인지하고 있는 품성상태’를 말한다. 예부터 강학과 제향기능이 있었던 서원이 현대교육의 도입으로 대중과 멀어지고 향사기능 위주로 축소되자, 정부에서는 2013년부터 ‘서원향교활용사업’을 기획, 지원하여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서원문화행사를 열어 왔다. 소수서원은 동양대 한국선비연구원의 협력으로 서원스테이, 사마(司馬)선비과정, 소수서원 필리아 등의 다양한 사업으로 서원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해왔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중에서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소수서원에서 옛 숨결을 느끼며 자연과 인문학으로 서원의 학맥을 계승하는 문화사업을 펼친다는 자체가 의미 있고 법고창신의 새로운 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를 통해 전국에 소재한 문화·자연·무형유산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며 다양한 아이템과 연계사업 추진으로 지역문화유산의 활용도를 높이고 고유한 문화전통으로 존속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리라고 본다. 세계문화유산과 함께 지역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적·물적 자원과 결합해 지역민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늘리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자 기획, 추진되는 문화사업이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