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 마을과 마을 이어주던 산속 교통로 잘 보존
포항 IC를 빠져나와 연화재에 이르면 길 양옆으로 산줄기가 나란히 펼쳐진다. 오른쪽이 포항 도심의 주산(主山) 양학산 줄기고, 왼쪽이 오늘 소개할 아치재다.
‘아치재’는 이름에서 보듯 산(山)도 아니고 령(嶺)도 아닌 재(峙)다. 100m 남짓한 조그만 봉우리이지만 시계를 잠시 전통시대로 돌려보면 재밌는 사실들과 만난다. 아치재 인근은 조선 후기엔 흥해군에 속했다. 당연히 인접한 포항과 흥해 사이에서 행정구역을 둘러싸고 많은 조정 과정이 있었다. 또 이름(阿雉)에서 보듯 꿩과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행정구역 상 같은 북구지만 외곽에 위치한 탓에 우창동이나 용흥동처럼 도시의 주류에 포함되지 못했고, 늘 도시의 변방으로만 머물렀다. 개발 수혜는 비켜갔지만 옛 전통부락 마을길, 지명 등 민속적 전통이 잘 남아 있어 포항의 옛 자취를 더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꿩이 알 품고 있는 지형을 지닌 ‘아치재’
흥해 이인~대련마을 잇는 산속 교통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부락 ‘아치골’
조선후기 흥해 동상면서 현재 우현동 속해
등산로 이정표 따라 걸으며 자연 경치 만끽
◇조선 후기 아치골은 흥해읍 동상면에 위치
아치재가 위치한 북구 우현동은 조선후기에는 흥해군 동상면(東上面)에 속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여천동(余川洞) 일부를 통합해 우현동이 됐다. 한자로 ‘우현(牛峴)’은 우리말로 ‘소티’ ‘쇠퇴’의 뜻인데 지명 유래와 관련해서 몇 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7번 국도를 따라 흥해로 넘어가는 재의 모습이 마치 ‘누운 소(牛峴)’같다 하여 유래됐다는 설, 둘째는 옛날 소장수가 날이 저물어 이 고개에서 잠을 자던 중 소뼈가 쌓여 있는 꿈을 꾸고 이 골짜기를 소티골로 불렀다는 설, 셋째는 ‘작은 고개’라는 뜻의 소티가 변음되어 ‘소현 ‘우현’으로 바뀌었다는 설 등이다.
우현동 일대는 옛부터 숲이 울창해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고장으로 소문이 난 곳이다. 현재는 시세(市勢)가 확장,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신흥 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 2019년 개통한 서울∼포항간 KTX의 역사가 흥해읍 이인리로 이전함에 따라 포항의 새 관문으로서 도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꿩이 알을 품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아치재
우현고개는 연화재와 함께 7번국도에서 포항과 흥해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아치재는 우현고개와 비슷한 공간에서 재(峙)로써 역할을 해왔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기능과 역할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우현고개가 큰 도로와 인접한 중심 도로에서 포항 북부와 흥해를 연결하던 재(峙) 역할을 했다면, 아치재는 아치골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주변의 마을과 마을을 잇던 산속 교통로로써 의미를 갖는다.
‘아치골’이라는 이름 유래도 재미있다. 마을 뒷산 봉우리가 알을 품고 있는 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유래됐다고 한다. 사실 꿩은 닭이나 오리처럼 가금(家禽)은 아니지만 산이나 들, 민가 주변에 동거하면서 반(半) 가금 상태로 인류와 함께 해왔다. ‘꿩먹고 알먹는다’‘꿩 잡는 게 매 ‘꿩 궈 먹은 자리’ 등과 같이 우리 속담에 등장하며 민중들의 일상 속에서 함께 공감해왔다. ‘꿩! 꿩!’ 하고 힘차게 우는 소리는 까치소리와 함께 마을을 울리던 정겨운 소음이었다. 또 밀밭, 보리밭이나 산에 수북이 알을 낳아 민초들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치골은 흥해-대련-연화재로 통하던 교통로
고향이 포항인 사람들도 아치재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 북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해 밖으로 드러낼 기회를 잘 얻지 못해서다.
나루끝 큰도로에서 우현동 쪽으로 접어들어 아치골사거리에서 한신휴 아파트, 우현 화성타운을 끼고 직진하면 잠시 후 아담한 못이 나오는데 바로 아치못이다. 전통시대 우현동 일대 농사를 위한 관개(灌漑)시설로 추측된다.
못의 북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본격 아치재의 시작이다. 아치재는 앞서 언급한대로 옛날 우현마을과 흥해읍 이인리, 대련마을, 연화재를 연결하는 교통로는 몰론 밤밭골, 수태골, 뒷골 같은 재(峙) 주변 마을을 이어주던 산 속 교통로다.
우주선이 행성을 날아다니고, 도로가 사통팔달로 뚫린 시대에 옛날 고샅길, 마을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의미를 두고 다가가면 전통시대 길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전통시대 옛길 걸으며 선조들 자취 탐방
아치골 등산로는 사방으로 뚫려 있어 어느 쪽으로든 진출이 가능하다. 골짜기 전반을 아우르고 싶다면 아치못-아치재-대안지-연화재를 모두 돌아보는 코스를 권한다.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10~20분 간격으로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아치재에서 20분쯤 비탈길을 급한 걸음으로 오르면 삼거리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아치골이고 왼쪽으로 가면 대안지-연화재 가는 길이다. 아쉽게도 아치골 골짜기에 민가(民家)는 이제 거의 없다. 흥해와 통하는 큰길 공사가 현재 진행 중이다.
삼거리에서 10분쯤 오르면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흥해읍 이인리 방향이고 직진하면 연화재다. KTX 역사가 들어선 이인리 쪽은 이제 전통마을은 볼 수가 없고, 대단위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산에서 만난 배정숙(72)씨는 “20~30년 전만 해도 아치재 주변엔 ‘뒷골’ ‘말골’ ‘큰골’ ‘밤밭골’ 같은 전통부락들이 널려 있었다”며 “이 모든 마을들의 중심에 아치재가 있어 (이 재가) 산속 교차로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이 길을 따라 흥해에서 포항장으로 가던 장꾼들이, 행정문서·세수미(稅收米)를 실은 아전들이, 대련으로 마실을 가던 민초들이 왕래했다.
◇연꽃 활짝 핀 대안저수지 돌며 늦여름 정취 만끽
아치재와 연화재는 30분 거리에 있다. 양학산으로 연결해서 산행을 하고 싶다면 연화재 육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산림조합 뒷산을 지나 시청 뒤 양학산과 연결된다.
흙산(土山) 위주 밋밋한 산행에 식상했다면 대안못 방향을 추천한다, 연화재 갈림길 못 미쳐 대안못-포항여자전자고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접어들면 된다.
대안지는 전통시대 조성된 소류지로, 작은 연못이지만 규모에 비해 호수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아담한 저수지를 푸르게 덮고 있는 연잎과 그 위를 아름답게 채색한 연꽃에, 싱그러운 초록의 기운에 빠져드는 것도 여름 산행의 이벤트다. 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데크가 조성돼 있고 못을 둘러싼 백일홍 등 수 십여 종 식물이 수채화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늦여름 한나절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아치재 옛길, 저수지 둘레를 걸으며 선조들의 자취를 한 번 느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인 듯하다.
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