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독도 수토(搜討)가 사회·정치적으로 혼란이 심각했던 조선말에도 정례적으로 시행됐다는 민간의 기록이 확인 됐다.
동해문화원·동북아문화재단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담기지 않은 조선 말기의 ‘울릉도·독도 수토’ 실시 내용을 동해지역 민간 기록인 ‘항길고택일기(恒吉古宅日記)’에서 다수 확인했다.
동북아문화재단이 광복 79주년을 맞아 지난 14일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재단 내 독도연구소 창립 16주년 기념행사로 ‘항길고택문고 속의 울릉도·독도 수토의 역사’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항길고택일기에는 삼척진영의 삼척영장에서 울릉도수토를 실시했다는 사실이 9차례 기록돼 있다. 일기에는 민란과 삼정의 문란 등으로 혼란했던 1859년(철종 10년)에도 울릉도수토가 실시된 것으로 기록됐다.
기록에 따르면 1859년 4월 9일 영장 강재의가 울릉도로 출발했다. 4월 18일 평해 구미진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로 향했다. 4월 25일 저녁에 수토선이 망상면 어내진에 정박했다. 4월 26일 영장이 진영(삼척포)으로 출발했다.
총 13책 118권의 ‘항길고택일기’는 1770년부터 1904년까지 118년간 강릉 김씨 감찰공파 가문에서 대대로 기록한 ‘지역의 일기’이다.
일기에는 조선말 어지러운 정치로 인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 담기지 않은 삼척진영의 삼척영장에서 울릉도 수토에 나선 기록이 남아있다.
‘항길고택일기’를 비롯한 항길고택문고는 조선시대 삼척도호부(현 동해시 송정동)에 정착해 세거(世居)해 온 강릉김씨 감찰공파가 소장하던 방대한 규모의 문고다.
조선시대 동해·삼척은 중앙정부와 울릉도·독도의 연결 거점이었고, 울릉도 수토를 관할한 삼척영장(三陟營將)의 본진이기도 했다.
수토제는 3년에 1번씩 삼척영장과 월송만호(越松萬戶)가 교대로 울릉도를 방문한 뒤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중앙정부로 조사 내용을 보고하는 제도다.
/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