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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골장터 ‘갯마을 차차차’ 촬영 이후 글로벌 관광지로

한상갑기자
등록일 2024-08-08 18:17 게재일 2024-08-0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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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전통시장을 찾아서  <청하시장>
오일장(1, 6일)이 열리는 청하시장 풍경. 지난 6월 방문 때 모습이다.

‘내가 맛집 기사 한 줄 쓰면 다음 날 음식점 앞에 줄이 쫙 섰지’. 10여 년 전 맛집 소개로 필명을 날리던 한 선배의 후일담이다.

몇 줄 글에도 손님들이 식당을 칭칭 감던 신문의 위력은 이제 예전 같지 않다. 오히려 ‘6시 내 고향’이나 ‘생생 정보통’ 같은 방송 매체에 주도권이 넘어가 버린 느낌이다.

요즘은 특정 장소를 알리는데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 세트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극(劇)에서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드라마 현장을 바로 확인할 수 있어 MZ세대들에게 소구력이 크다고 한다.

근래 포항에서 드라마에 등장한 후 크게 인기를 끄는 곳이 있다. 바로 포항시 청하면에 있는 ‘청하시장’이다. 2021년 tvN ‘갯마을 차차차’가 방영되면서 청하시장은 전국적 명소 반열에 올라섰다. ‘3년이나 지났는데 드라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아직도 시장통에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심지어 곳곳에서 외국인들의 수다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한가로운 시골 전통시장이 경북의 명소를 넘어 글로벌 관광지로 도약한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고려 후기 동해안 물류집산지로 뿌리

1920년대 일제강점기때 시장 개시

1970~90년대 장꾼 몰려 성시 이루다

2000년대 이후 들어 급속히 상권 위축

2021년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방송

몇달 만에 외국인 등 관광객 10만여 명

‘보라슈퍼’·‘공진반점’·청호철물’ 등

지금도 공진시장 세트장 풍경 그대로

◆고려 후기 이후 동해안 지역 물산 집중

포항에 본격적으로 인간이 터를 잡은 것은 흥해읍의 지석묘를 통해 보듯 청동기시대부터였다. 이 지역엔 변진 24국 중 하나인 근기국(勤耆國)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은 동해안을 배경으로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근기국은 후에 신라에 복속되면서 경주 세력의 군현체제 아래 편제됐다.

6세기 후반 청하 일대에는 냉수리고분을 축조한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덤 양식, 부장품을 통해서 볼 때 냉수리 세력은 포항의 북부, 동해를 배경으로 상당한 정치, 경제 세력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아혜현(阿兮縣)이 있었던 청하면 일대는 고려 후기 이후 동해안의 물류 집산지로 뿌리를 내렸다.

‘청하(淸河)’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태조 13년으로 이때부터 청하는 흥해, 영일, 장기와 함께 독자적인 행정 구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청하시장의 개시(開市) 연도는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볼 때 1920년대 일제강점기로 추측된다. 1910년대 이미 청하면은 17개 리(里)와 동(洞)을 관할할 정도로 면세(面勢)를 형성했다고 하니 전통시장의 출현은 훨씬 그 이전이 아닌가 한다.

 

청호철물 모습.
청호철물 모습.

◆1970~90년대 장날엔 장꾼들 대혼잡

청하시장은 위로 영덕, 남쪽으로는 흥해 사이에 위치한 소규모 시장이다. 주변에 우시장, 어시장이 들어섰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장옥(場屋) 규모도 크지 않아 읍면 단위의 상권을 담당한 정도였던 것 같다.

청하시장은 단층상가 두 곳을 아케이드로 연결한 형태로, 점포수도 많지 않다. 그러나 시장 전체 면적은 상당히 넓은 편이고, 광장이 잘 발달돼 있어 상설시장보다는 오일장(1, 6일)에 최적화된 구조다. 현재 대로변과 장옥 등의 상가는 약 90여 곳으로, 입점 상가들은 보통 시골 장터처럼 과일, 건어물, 철물점, 신발, 잡곡, 의류, 어류, 농약, 종묘, 가축 등이다.

30년째 시장을 지켜왔다는 한 어르신은 “1970~90년대만 해도 청하시장 장날엔 인근 흥해, 영덕, 포항은 물론 영천, 경주에서도 장꾼들이 몰려들 정도로 성시(盛市) 이루었다”고 말한다. 바다에 인접해 꽁치, 가자미, 오징어, 고등어 등 각종 수산물이 풍부하고, 또 인근에 평야, 산지 농사가 잘 발달해 과일, 채소 등 농작물 난전도 크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한때 주변 20~30리 장꾼들과 난전들을 불러 모으던 청하시장은 2000년대 이후 상권이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령화, 이농현상, 저출산 등 전반적인 사회현상 때문이다.

 

◆‘갯마을 차차차’ 방영 이후 전국적 명소로

경북 동해안 오지의 작은 시장으로 활력을 잃어가던 청하시장에 2021년 귀한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tvN의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제작팀이었다.

짠내, 사람 내음 가득한 바닷가 마을 ‘공진’에서 펼쳐지는 힐링, 로맨스 드라마는 국내는 물론 넷플릭스 시청률 전체 순위 10위권에 랭크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드라마 히트는 극의 무대인 청하시장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드라마가 회(回)를 거듭할수록 촬영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늘어났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2021년 10월부터 다음에 초까지 약 10만여 명의 관광객들이 시장을 다녀갔다고 한다. 한 달 평균 3만~4만 명이 이곳을 다녀간 셈인데, 덕분에 지역 경제에도 관광 특수가 일었고, 시장 매출도 몇 배씩 늘었다고 한다.

노점을 운영하는 한 어르신은 “드라마가 방영되던 당시에 하루 종일 젊은이들이 시장을 찾아 사진을 찍고, 세트장을 둘러보느라 연일 인파로 북적거렸다”고 말한다.

드라마를 시청했던 외국인들의 방문도 러시를 이뤘다.

모종을 파는 한 상인은 “주말이면 관광객들을 실은 관광버스, 승용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웠다”며 “덕분에 시장통에서는 하루 종일 외국어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고 기억했다.

 

보라슈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
보라슈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

◆보라슈퍼, 공진반점, 청호철물 그대로

청하시장엔 현재도 드라마 속 공진시장 세트장과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드라마 촬영 당시 시장의 25곳 점포는 드라마 세트장이 됐지만 상인들도 불편함을 감수하며 촬영에 협조했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보라슈퍼’도 남아 있다. 현재 보라 엄마는 없지만 쫀드기, 아폴로, 사탕, 과자와 장난감들을 팔고 있다.

자장면, 탕수육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던 ‘공진반점’ 간판도 그대로다. 대신 메뉴는 곰탕, 소머리국밥, 국밥으로 바뀌었다.

보라 아빠가 일하던 ‘청호철물’엔 지금도 옛날처럼은 아니지만 셀카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문앞에 소품용 의자를 준비해 사진을 찍도록 배려했다. 전직 가수 오윤이 운영하던 ‘한낮에 커피 달밤에 맥주’도 사진 촬영 명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파스텔톤의 건물과 고즈녁한 풍경 덕에 드라마 당시 낭만적인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가 정말 우리가 찾던 곳이었어요.’ 당시 드라마 제작진들이 촬영을 위해 이곳을 답사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준비된’ 세트장 분위기를 배경으로 드라마가 성공을 거두고 시장이 관광지로 부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개인과 국가가 성장, 발전 과정에서 흥망성쇠를 겪듯 동네 어귀의 시장도 수없이 부침(浮沈)을 반복한다. 일제강점기 청하, 신광면에서 생필품 조달 창구로 시작한 청하시장은 1980~90년대 사방 30리 난전(亂廛)들을 불러 모을 정도로 번창하다 안타깝게 이제 쇠락기를 맞았다.

이런 침체기에 갑자기 나타난 ‘갯마을 차차차’ 촬영팀은 시장을 지역 명물, 국가적 명소를 넘어 글로벌 관광지로 도약시켰다.

시장으로 치면 로또를 맞은 셈인데, 이젠 자치단체와 상인들이 이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혜를 모을 때가 아닌가 한다.

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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