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 트위터에 이어 크고 작은 문단 일들을 실어나르는 도구가 되었다. 과장을 하고 엄살을 피우고 그렇지 않아도 현시욕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하다.
‘정파고’라는 분이 각 SNS의 특징을 인용해 놓은 것이 있다. 페이스북: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 트위터: 나 이렇게 병신이다. 인스타그램: 나 이렇게 잘 먹고 산다. 트위터 요약의 비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누군가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문학인들이 아직은 인스타그램에 몰두하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학인이 나 이렇게 잘 먹고 산다는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가기에는 아직들 배가 고프다고 할 수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이스북에서 얼마 전에 표절 논란이 하나 일었다. 이런저런 사례들로 문단에서 표절은 아주 치명적임이 입증되었지만, 요행히 피해 가는 사람도 있고, 별일 아닌 것이 크게 과장되기도 한다.
한 모임이 있어 오랜만에 나들이를 했는데, 마침 입에 올리기 꺼림칙한 표절 논란으로 큰 곤욕을 치르신 분을 만났다. 사태의 전말에 대해 나 나름대로 판단은 섰지만 이 글에서 그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직접 당사자를 대면하면 그냥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인지상정, 나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돌아오는 말씀이 뜻밖이었다.
당신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지나칠 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정심을 많이 되찾았다 하셨다.
그래, 나는 그분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 문단에서 그런 일은 보통 일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일이 생기면, 마음에 문제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욕구가 일게 되는데, 젊은 시절부터 그것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오셨다고 하셨다. 그래, 이번에도 일을 당하여 당신 자신을 옹호하려는 마음이 이는 것을 깨달으며, 당신이 잘못한 일로부터 생겨난 문제라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하셨다.
이에 나는 겉으로 큰 반응을 나타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내 자신의 숱한 경험으로도 무슨 일이든 나는 옳고 나와 갈등하는 다른 이는 그릇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둘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나 자신이 옳은 일도 많았고, 틀리고 그릇된 경우도 참 많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옳았던 일도 더 넓은 견지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경우도 아주 많았다. 또 근본적으로는, 세상에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날 때, 그 몸과 마음에 무슨 옳고 옳지 못함이 함께 있었겠는가.
표절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물텀벙에 빠져 허우적도 거리셨을 텐데, 그렇게까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까지, 그분은 얼마나 자신을 모질게 대했어야 할까.
마음의 심급.
내 머릿 속에 떠오르는 다섯 개의 글자다.
마음의 심급을 생각해 본다. 어느 깊이에 이르러야 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헤아려 본다. 그리고 끝내 완전한 옳음에는 이를 수 없을, 불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나와 물을 건너가는 이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다. 괴로운 심사가 조금은 편안해지기를 기대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