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기념재단 창립 30주년 ‘오월문학총서’ 시리즈 출간
‘반성으로 돌아보지 않은 역사는 또 다른 비극으로 잉태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는 장르를 불문한 한국의 작가들이 ‘1980년 5월 광주’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5월. 열흘간 전개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한국의 인권 신장과 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부정하는 이들은 드물다.
잊어서는 안 될 한국 현대사 속 ‘5월정신’을 알리는데 진력해온 5·18기념재단(이사장 원순석)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최근 출간된 ‘오월문학총서’ 시리즈는 바로 이 5·18기념재단 주도로 한국의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문학평론가들의 ‘5월항쟁’ 탐구 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서적 간행의 실무 총괄책임은 이승철(시인·한국문학사 연구가·사진)이 맡았다.
본지는 20대부터 50대까지 3명의 기자가 참여해 이 책을 함께 읽었다. 아래 23세 성지영 인턴기자, 30세 단정민 수습기자, 54세 홍성식 특집부장이 각자의 역사의식과 세대 감각으로 읽어낸 ‘오월문학총서’ 독후감을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시·평론
각기 다른 스타일로 그려낸 200여 시인 작품 모아
5월 문학 형성에 기여한 작품의 평론 16편도 수록
시는 파토스(patho)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문학 장르다. 시인들에게 순간의 격정과 열정을 보여주기에 ‘1980년 5월 광주’만한 소재가 또 있을까?
그게 슬픔과 비극의 역사라 할지라도, 한국의 시인들은 그 속에서 눈물 어린 희망과 어두운 터널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환한 미래를 찾아내고자 고군분투 해왔다.
‘오월문학총서’ 1편으로 묶인 ‘시’. 여기엔 200명이 넘는 시인들이 참여했다. 그들은 각기 다른 형식과 스타일로 ‘5월 그날’의 아픔을 문장 사이사이에 새기고, 역사 속에서 부활하는 5월 희생자들을 노래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이 책에 기꺼이 수록해준 시인들은 최근 타계한 문단의 원로 신경림(1936~2024)부터 2007년 ‘5·18민주화운동 기념 서울 청소년 백일장’ 당시 18세 여고생이던 장원 수상자 정민경까지 연령대의 프리즘이 넓다. 그렇기에 각각의 세대가 인식하고, 해석하고, 전망하는 ‘5월정신’을 한 권의 책에서 효과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시인의 특정 작품을 지목해 거론할 것도 없다. 책에 실린 시인들의 노래 하나하나 모두가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위대한 ‘시민정신’을 기억하고, ‘절대공동체’라는 아름다운 ‘대동세상’을 소환할 것”이란 간행위원회의 바람에 답하는 것들이 분명해 보인다.
시가 행간에 숨은 의미를 은유와 상징을 해석해 읽어내는 것이라면, ‘평론’은 로고스(logos)를 기반으로 쓰인 글이기에 보다 이성적인 태도의 독서가 필요한 문학 장르.
오월문학총서 4편 ‘평론’은 “5·18에 대한 근본 문제를 중심에 둔 총론격의 글과 문학 장르를 중심으로 시, 소설, 복합 영역으로 나누어 기존 발표작 중에서 골라낸 11편의 글, 5월문학 형성에 기여한 문학예술인과 작품을 심도 있게 논의한 신작 원고 5편 등 총 16편을 수록했다”는 게 간행위원회의 설명이다.
‘5월정신과 아시아 민주주의’라는 김동춘의 평론으로 시작되는 책은 ‘5월 시문학의 흐름과 전망’(이성혁), ‘고통과 문학, 고통의 문학’(김영찬), ‘절대 신화 너머의 자리, 포스트-광주’(김영삼), ‘5월, 죽음이 삶이었던 시의 시대’(이영진) 등으로 이어진다. 수록된 평론 대부분이 주도면밀한 읽기와 비판적 재해석이 필요한 글들로 보인다.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단단한 벽돌 역할을 할 것들이기에 그 중요성이 시와 다를 바 없이 만만찮게 느껴진다.
소설
이순원의 ‘얼굴’·전성태의 ‘지워진 풍경’서 그려낸
길고 아득했던 살육의 현장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
2011년 5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를 기념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올해 5·18기념재단과 출판사 ‘문학들’은 ‘오월문학총서’ 제2차분을 최근 출간했다.
이 총서는 1980년 이후 발표된 오월문학 작품을 집대성해 5월정신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목표로 하며, 5·18의 왜곡된 진상을 바로잡고자 기획됐다. 이번 총서 중 하나인 소설집은 40여 편의 중단편 소설 중 15편을 선정, 세대와 시각을 초월한 다양한 작품을 담고 있다.
책을 펼치면 이순원의 ‘얼굴’이란 소설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주인공인 아들은 월부로 자기 방에 놓아둘 텔레비전과 비디오 세트를 구입하고, 구할 수 있는 대로 ‘광주항쟁 관련 비디오’를 구해 복제하기 시작한다. KBS의 ‘광주는 말한다’를 볼 때도 그는 내내 거기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자신의 얼굴을 찾기에 바쁘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고 이에 안심하지만, 한 번씩 오랫동안 묵혀뒀던 기계를 점검하듯 테이프를 꺼내 그것들을 다시 확인한다. 어느 날 문득 그 속 어딘가에 자신의 얼굴이 화면 안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기게 되면서다. 1980년대 이른바 ‘서울의 봄’. 33개월의 군 복무 기간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더 길고도 아득했던 살육의 현장에 서 있던 아들은 죄책감에 빠져 술과 함께 긴 밤을 지새우지만, 오늘도 철모를 쓴 계엄군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순천대 교수로 재직 중인 전성태의 ‘지워진 풍경’에는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으로 인해 말하지 못할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 ‘노인과 그 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들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고 있다. 계엄군이 돌아와 시민들을 살해하던 밤. 그는 이불 속에 숨어 총성을 들었다. 숨죽여 우는 어머니, 윽박지르는 아버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누이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지만 지금도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듯하다. 아들의 아버지인 노인은 아들과 같은 증상으로 치료를 받는 많은 환자들이 망상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큰 지장 없이 일상을 견딘다는 말에 위안을 받지만….
이처럼 오월문학총서 소설 15편에는 광주 오월의 모습이 다각적으로 담겨있다. 특히 ‘5월정신’을 승화시키고자 한 작가들의 마음이 실감 나는 묘사를 통해 잘 전달되고 있어 다양한 세대가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5월 광주의 소설’을 만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희곡
목숨 걸고 싸운 젊음들의 이야기 ‘어느 봄날의 약속’
18세 안종팔·전도사 문운동 등 안타까운 죽음 다뤄
‘오월문학총서’는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자 집필한 책이다. 오늘날 우리는 군사정권에 맞서 국가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 시절 젊은이들의 피를 숭고하게 생각하는가?
‘오월문학총서’ 희곡편은 지금의 우리를 뜨거웠던 민주항쟁의 현장으로 데리고 가 광주시민들이 느꼈을 뜨겁고 무거운 호흡에 동참시킨다. 그중 박지현의 ‘어느 봄날의 약속…’은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싶은 18세 안종팔이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와 담임선생님(박선조), 그리고 기독교 전도사(문운동)와 함께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죽음에 이르는 비극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극의 분량이 그다지 길지 않음에도 18세의 어린 나이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 싸우고자 하는 안종팔의 의지와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앞두고도 국가를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문운동 전도사의 용기가 경이로웠다.
극은 안종팔의 시신을 보고 창자가 끊어질 듯 절규하는 안종팔의 어머니(김경숙)의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문운동 전도사는 정의를 지키는데 어린 생명이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결국 5·18은 셀 수 없이 많은 어린 생명을 앗아갔다.
박지현의 ‘어느 봄날의 약속…’은 독자들에게 ‘만약 내가 광주항쟁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거듭해 고민하게 만든다. 총칼을 거머쥐고 있는 군인들 사이로 뛰어가 “계엄령을 해제하라”, “유신잔당 퇴진하라”를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극의 마지막인 에필로그. 5·18 민주화 운동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이 항쟁 전 약속했던 것처럼 한자리에 모여 극의 주제곡인 ‘어느 봄날의 약속’을 부른다.
1980년 5월 광주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참 많았을 듯하다. 이미 4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떨어지는 꽃잎처럼 지지 말고 활짝 핀 꽃으로 돌아오라”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안종팔의 앳된 얼굴이 오랫동안 아른거렸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단정민 수습기자 sweetjmini@kbmaeil.com
/성지영 인턴기자 thepen02@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