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청소년 시집‘해저 연애 통신’출간한 시인 이병철
1407일 동안 특정 신문사에 칼럼을 연재했다. 3년 6개월의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단 한 번 자신의 원고를 ‘펑크’낸 적이 없다. 그 사람이 타자와 맺은 약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한국에서 ‘대학 시간강사’란 세칭 ‘3D 업종’에 가깝다. 그 일을 얻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은 경제적 이익과 무관하다. 이병철은 대학 시간강사다. ‘돈이 되지 않는’ 그 일을 유지하기 위해 중고 오토바이를 구입해 음식 배달까지 했지만, 그때도 절망하거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상대와 한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며, ‘도저한 예술가의 낙관성’까지 지닌 이병철은 30대의 끝 무렵을 살고 있는 시인이다. 문학평론도 한다. 뿐인가. 프로페셔널 수준의 낚시꾼이며, 아마추어를 넘어서는 야구 선수(투수)의 면모까지.
바로 그 이병철이 이번엔 ‘청소년 시집’을 출간했다. 이 시인의 10번째 책이다. 기자에겐 이번 출간이 ‘의외의 이벤트’로 느껴졌다.
그의 활동 영역이 앞으로 얼마나 더 확장될 것인지 예측하는 건 쉽지 않다. 다만, 어째서 ‘청소년을 위한 책’을 썼는지는 궁금했다. 더불어, 아직도 ‘앞길이 구만 리’인 그의 향후 계획까지 묻고 싶었다.
아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전화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이병철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선배 시인 조언으로 청소년 시집 첫발
어려운 관념이나 화려한 기교 보다는
친구와 마주앉아 있다는 느낌 주고파
“나는 네가 원하는 뭐든지 될 수 있어”
오직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순수
억척스러워 보이기만 했던 부모의 삶
어릴 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어
-청소년 시집 출간은 처음으로 안다. ‘해저 연애 통신’을 내고자 마음먹은 이유는.
△한 선배 시인이 내가 쓴 시 한 편을 보더니 청소년들을 위한 시로 바꿔 보면 좋겠다고 했다. 호기심이 생겼는데 아예 자연, 낚시, 학창시절 등을 소재로 50편쯤 시를 써 책으로 묶으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받았다. 10년 전 서대문구 성산 지역아동센터에서 저소득층 아이들과 동시 창작 수업을 했고, 또 몇 해 전에는 단대부고 문학동아리 지도 교사를 맡은 적이 있다. 그때 아이들이 참 좋았다. 청소년 문학에 대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해저 연애 통신’이란 제목이 흥미롭다. 어떤 의미인가.
△원래 제목은 ‘나, 너한테 낚였어!’였는데, ‘낚시’라는 소재가 너무 부각되는 느낌도 있고, ‘낚다’에 보이스피싱이나 스미싱 같은 신종사기 수법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며 출판사에서 ‘해저 연애 통신’으로 바꿨다. 깊은 바다 속은 뭐가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세계다. 사춘기 청소년의 내면도 저 바다 속처럼 무궁무진하며 무한한 잠재력과 꿈들로 가득하지 않나. 이 시집은 어른들이 모르는 청소년들만의 비밀스런 세계에서 알록달록한 산호초처럼, 은빛 정어리떼처럼 다채롭게 반짝이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우리가 통칭하는 ‘시’를 쓸 때와 ‘청소년 시’를 쓸 때는 뭐가 다른가. 그리고, 어떤 게 더 어려운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시가 좀 더 쉽고, 쓰면서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관념이나 잠언, 화려한 기교나 수사를 배제하고 내가 청소년 화자가 돼 또래 친구와 마주앉아 있다고 생각하며 시를 썼다. 읽는 청소년 독자들도 시 속 화자를 어른이 아닌 친구로 느꼈으면 한다. 청소년이 읽을 시에서는 아무래도 가독성과 흥미 요소, 그리고 무엇보다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과 그들만의 세대 문화에 부합하는 공감대가 중요한 듯하다.
-기획-집필-퇴고-출간까지 걸린 기간은. 출간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무엇이었나.
△2019년 초에 청소년 시집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 겨울방학을 이용해 시집 한 권 분량을 탈고했다. 산문집과 평론집 등 다른 책들이 나올 예정이라 청소년 시집 출간은 다음으로 미루었는데, 출판사에서 원고가 좋으니 우수출판콘텐츠 등 지원사업 수혜를 받아 내면 어떻겠냐고 해서 그렇게 몇 차례 사업에 응모하고 탈락하고를 반복하느라 출간이 늦어졌다. 올해 경기도와 안양문화예술재단 지원사업인 ‘모든예술31’의 수혜를 받아 원고가 완성된 지 5년 만에 출간되게 됐다.
-이번 책에서 딱 한 편만 골라 읽어야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걸 추천하는가.
△미학적인 시, 메시지가 좋은 시, 핍진한 페이소스가 재현되는 시 등 추천하고 싶은 시가 여럿 있지만, 표제작 ‘해저 연애 통신’을 꼽고 싶다. “여기는 비밀, 우리만의 세상”에 어른들이 많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청소년들을 개성과 취향과 자의식을 지닌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해줬으면 좋겠다. 어른들이 원하는 무엇이 되기보다 “나는 네가 원하는 뭐든지 될 수 있어”라고 짝사랑 상대 아이에게 큰소리치는 낭만은 오직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이다. 청소년들의 그 순수함을 예쁘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시를 추천한다.
-‘해저 연애 통신’ 출간 이후 선후배 작가와 독자들의 반응은.
△재밌게 읽었다는 반응이 많다. 내 청소년기가 자전적으로 담겨 있는 시들도 있어서 시를 읽으며 시인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몇몇 시들에는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거의 다 친구들이나 주변인들 이름을 가져다 쓴 것이다. 시집 출간 전에 친구들한테 “네 이름이 나온다”고 하자 다들 흔쾌히 기뻐했다.
-청소년을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역시 사랑이 아닐까. 부모님과 가족의 조건 없는 그 무한한 사랑. 어릴 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다.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끌어안고 쓰다듬고 “사랑해”라고 말해야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어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도 당신들의 삶을 다 제쳐두고 자식을 위해 사셨다. 그 억척스럽고 지난한 삶에서 다정함이나 살가움 같은 게 참 힘들고 어렵다는 걸 나이 먹으니 좀 알 것 같다. 삼시 세끼 먹이며 공부시켜야 한다는 부모님의 일념이야말로 가장 뜨거운 사랑이었다.
-이번 책이 10번째 저서다. 적지 않은 숫자다. 집필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지.
△술 마시고 놀고 낚시 다니고 여행 가는 등 바깥으로 보이는 한량의 생활이 압도적인 것 같아도 실은 보이지 않는 방 안에서 읽고 쓰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항상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듯하다. 가장 큰 동력은 열등감과 무력감이다. 어떤 글을 써도 만족스럽지 않다. 시를 쓰면 마음에 들지 않아 산문을 쓰고 산문을 쓰면 또 마음에 들지 않아 비평을 쓴다. 비평이 형편없어 다시 시를 쓴다. 벌써 10년 가까이 매주 혹은 격주 쓰고 있는 신문 칼럼은 문학적 글쓰기를 위한 일종의 준비운동으로 여긴다.
-다음에 출간될 책은.
△세 번째 시집 원고가 꽤 모였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50편쯤 되는데 그중 20~30편은 버리고 새로 쓰고 싶다. 다음 책으로는 시집이 가장 앞줄에 있고, 박사학위 논문을 조금 라이트한 학술서적으로 고쳐 출간할 생각도 있다. 2019년에 경북매일에 연재한 ‘경북 바닷길 기행문’에다 다른 지역 여행기를 합쳐 전국 기행으로 완성한 가칭 ‘길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원고가 있는데, 출간은 쉽지 않아 보인다. 책을 내줄 출판사가 있으면 좋겠다.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시간강사다. 어떤 보람과 어려움이 있는지.
△비전임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늘 괴로워해야 하는 일이다. 출강하는 두 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있지만 사실 시간강사의 다른 이름이다. 강의와 학생 지도, 상담에만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질 않으니 외부강의나 집필활동, 부업 등을 겸할 수밖에 없다. 내 경우엔 지난해까지 배달 라이더로 일했다. 비전임교원은 방학에 급여가 지급되지 않고, 건강보험도 지역가입자로 전환된다. 그리고 학교에 연구실이나 휴게실이 될 만한 공간 또한 제공되지 않으므로 강의와 강의 사이 휴식이나 학생 상담 같은 게 어렵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학생들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가 좋아서, 소설이 좋아서 반짝이는 그 눈빛들을 보는 일은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다.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수업을 통해 무언가 얻어갈 때 정말 기쁘다.
-멀리 10년 후를 내다보는 당신의 장기계획이 궁금하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닐 때 지하 납땜 실습실에서 ‘전문대 문창과 입학-4년제 편입-육군 학사장교-대학원 진학-석사 및 박사-등단-책 출간-강의’라는 10여 년의 단계적 꿈을 꿨고 운이 좋아 그대로 됐다. 현실적으로는 대학의 전임교원이 되는 걸 최우선 계획으로 삼아야 하는 게 맞는데, 이상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저 계속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지금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 사랑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
△‘해저 연애 통신’은 청소년들이 읽기 좋은 책인 동시에 학부모와 교사들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시집에는 여름방학의 계절감이 주로 펼쳐져 있으니 곧 다가올 여름방학 동안 부모와 자녀가 함께, 교사와 학생이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모든 분들에게 푸른 바다를 달리는 은빛 물고기떼처럼 맹렬하게 반짝이는 행복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