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거촌에 자리한 효구총 비석 <br/>잡혀간 어미개 그리워하며 죽은<br/>강아지의 효에 관한 지역 설화로
모두 효에 대한 말들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부모 없이 자식이란 있을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정성과 희생으로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는 건 자식의 당연한 도리로 가장 사람다운 일이다.
봉화군 거촌에는 사람이 아닌 강아지의 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과 개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미 개와 강아지의 효에 관한 이야기가 있으며, 효구총이 존재하는 것. 봉화 거촌은 ‘광산 김씨’ ‘원주 변씨’ ‘전주 이씨’ 세 문중이 나란히 집성촌을 이루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원주 변씨 문중에 전하고 있는 효구 이야기는 인간과 개의 교감을 바탕에 둔 이야기가 아니고 어미 개와 강아지에 관한 이야기다. 어미 개가 변씨 집안에 충직하여 아낌을 받았는데, 새끼가 태어나고 밖에 나가 먹이를 얻으면 반드시 토해 강아지에게 먹였는데 주인이 더러운 것을 물고 온다고 야단을 쳐 말렸지만, 어미 개는 그 일을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개백정이 먹이를 던져주며 잡아가려 하자 새끼강아지가 놀라 괴성을 지르고 날뛰었으나 끝내 어미 개는 잡혀가고 말았다. 새끼강아지는 그날부터 먹이를 먹지 않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을 치다가 12일 만에 죽었다. 그 강아지가 죽은 후에야 ‘효구’란 것을 알게 되었고 마을 앞산에 묻어 주었다. 이후 강아지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숭고한 효에 대한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을 만들어주기로 하고 파보니 6월 무더운 날씨였는데도 상하지 않고 묻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기이하게 여겨 관청에 고하니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였고 무덤을 효구총이라 했다.
효구총 주변 소나무 그늘은 행인들과 등짐장수들의 쉼터가 있었는데 효구총이라 새겨진 비를 보고 사람도 효자가 없는 세상에 효구가 말이 되느냐고 내리쳐 두 동강이 나고 좌대에서 떨어져 나갔다. 지금은 좌대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무덤 앞 바위에 효구총(孝狗塚)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원주 변씨 백산 변경회(1573~1663)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산을 모두 팔아 군량을 내주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 군사와 군량을 모았고, 영호남의 많은 의병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했다. 봉은 변극태(1654~1717)는 1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밤에 빈소에 있던 중 도적이 들어 칼로 부친을 찌르려 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 몸으로 막으니 부친은 무사하고 큰 상처를 입어 혼절했다. 다행히 소생해 불편한 몸으로 평생 친척과 이웃을 도왔다.
효열부 권씨 부인은 부군이 병으로 죽어 후사를 바라볼 수 없게 되자 부군 기일에 제사를 지낸 후 음식을 이웃에 고루 돌리고 날이 밝으려 할 무렵 후미진 곳에서 자진했다. 원주 변씨들은 백산 변경회의 충성심과 봉은 변극태의 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집을 지을 때는 효의 상징인 소나무와 충의 상징인 대나무를 그려 넣어 기왓장을 쓰고 있다.
봉화 거촌 효구총은 당시 경북 북부지방의 관도에 접하여 행인들의 쉼터로 이용하던 곳에 있었다. 이는 그 효행을 기리고 교훈 삼고자 하는 까닭이었다. 개가 인간을 돕거나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는 전국 각지에 많이 퍼져 있다. 의견, 의구, 효구, 충견 등으로 부르는 개의 이야기는 피폐해져 가는 인간사회에 감동과 교훈을 준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