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의 향기가 남아 있는 사랑의 고장 전북 남원
어떤 여행지를 한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지만 전북 남원을 여행할 때면 이곳은 ‘사랑의 고장’ 같다는 생각을 한다. 비단 신분을 뛰어넘은 영원한 사랑의 고전 ‘춘향전’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는 기차도 다니지 않는 간이역에도 애틋한 사연이 숨어 있는 것 같고 뜨끈한 추어탕 한 그릇에도 살가운 남원 사람들의 사랑의 마음이 느껴진다. 남원은 그런 곳이다. 화려한 볼거리는 없어도 마음을 건드리는 풍경이 남아 있는 남원으로 주말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여행의 시작점은 이몽룡과 성춘향의 광한루원, 뛰어난 조경으로 국내 4대 누각 손꼽혀
광한루 앞 은하수 연못·인공 삼신산 멋들어진 조화… 밤이면 불빛 더해 황홀한 색의 잔치
대하소설 ‘혼불’ 배경 노봉마을 흔적 고스란히, ‘미스터 션샤인’ 쵤영지 옛 서도역 정겨워
◇춘향이의 사랑이 느껴지는 광한루원
남원 여행의 시작점은 광한루원이다. 광한루원의 광한루는 ‘춘향전’에서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성춘향의 인연이 시작된 곳이다. 두 사람의 신분을 뛰어넘는 로맨스는 거침이 없다. 농밀한 애정 신부터 애달픈 이별과 박진감 넘치는 만남까지 성공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의 법칙을 제대로 보여준다. 춘향전은 판소리는 물론 수많은 창극과 신소설, 현대소설, 연극,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광한루원은 남원의 젊은 남녀들이 데이트 장소로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광한루원은 누각인 광한루와 연못, 그리고 연못 한가운데 조성된 세 개의 섬과 오작교 등으로 이뤄져 있다.
광한루 옆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에 나오는 다리라 ‘춘향전’의 배경인 광한루 앞에 놓였다는 점이 약간 생뚱맞지만, 이 다리를 건너면 부부간의 정이 깊어진다는 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광한루 앞 ‘은하수 연못’ 중앙에는 ‘삼신산’이 있다. 이 ‘삼신산’은 전설 속에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을 섬으로 만들어 조성한 것이라 한다. 작은 섬들을 잇는 다리 위에서 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광한루원은 국내 조경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크다. 우리나라 문인(文人)들은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국내 4대 누각의 하나이자 한국의 정원을 대표할 만큼 독특한 조경지로 평가받고 있다.
광한루원은 관아가 주도해 지은 관아 원림이다. 관아 원림이란 고을의 관원이나 시인 묵객들이 연회와 풍류를 즐긴 야외 정원이다. 광한루원은 중심 누각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그 일원에 조영된 원림을 통틀어 지칭하는 이름이다.
광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 형태의 누각이다. 남쪽에서는 간결한 구조로 보이지만, 북쪽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장식적인 외관에 눈길이 쏠린다.
역사적으로 광한루는 조선시대 명재상이었던 황희 정승과 관련이 깊다. 황희 정승은 1418년 양녕대군의 세자 폐출을 반대하다 태종의 진노를 사서 경기 파주 교하리로 귀양 보내졌다가 남원으로 유배됐다. 이때 황희 정승이 지금의 광한루에 누각을 짓고 광통루라 불렀다. 1444년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이곳을 찾아 “달나라 궁궐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비슷하구나”라고 감탄했다 하여 광한루라 불리게 됐다.
광한루는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세조 때인 1461년 남원 부사 장의국은 은하수를 상징하는 인공 연못을 조성하고 돌다리인 오작교를 놓았다. 훗날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해온 송강 정철은 연못에다 신선이 사는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을 의미하는 세 개의 인공 섬을 조성하고, 섬마다 영주각과 방장정을 세웠다. 남원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광한루는 안타깝게도 정유재란 당시 완전히 불에 타고 말았다. 현재의 광한루는 인조 때인 1639년 새로 지은 것이다.
광한루엔 당대 문호들이 쓴 시문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멋들어진 정자가 있으니 드나든 시인도 허다했다. 호남을 지나는 선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렀다고 한다.
광한루는 낮에도 풍광이 빼어나지만 특히 교교한 불빛이 건물을 비추는 밤이 더 아름답다. 땅거미가 지고 주변이 어두워지면 삼신산의 방장정과 그 너머 대숲까지 조명이 들어온다. 불빛은 물과 나무 누각의 모습을 환상적으로 만든다. 아침부터 찌푸렸던 하늘에 눈이 내리자 불빛과 눈이 어우러져 황홀한 색의 잔치를 벌인다.
광한루원 근처에 있는 만복사지도 꼭 둘러볼만 하다. 고려 문종 때 창건한 만복사는 조선전기 최초 한문소설인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과 관련이 깊은 사찰터다.
만복사는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당시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발굴조사 당시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층 석탑(보물 제30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여래입상(보물 제43호) 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지 노봉마을
남원은 춘향의 고향이자 ‘혼불’의 고장이기도 하다. 최명희의 대하 장편소설 ‘혼불’이 남원 매안 이씨 집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혼불’은 조선시대의 봉건문화 속에서 대를 이어가는 종가의 모습과 신분 해방을 꿈꾸는 하층민 간 갈등 및 애환을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무대인 노봉마을에는 소설 속의 종가, 노봉서원, 청호저수지, 새암바위, 달맞이동산 등 마을 주변이 그대로 살아 있다. 혼불문학관에는 고인이 된 최명희 작가의 원고를 형상화한 디오라마가 전시돼 소설 속의 느낌과 정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혼불문학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옛 서도역 또한 ‘혼불’의 무대가 된 곳이다. 옛 서도역은 1930년대 서도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서도역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서도역은 원래 논바닥이었는데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역이 됐다. 전라선의 이설로 새로운 서도역이 생기자 구 서도역 역사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마을 주민들과 남원시가 힘을 합쳐 역사와 부지를 매입하여 지금의 구 서도역 영상 촬영장소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한성으로 가기 위해 역에 나타난 애기씨 고애신(김태리)을 고동매(유연석)가 기다리는 모습이 촬영된 곳이다. 서도역은 나무로 만들어져 다른 폐역보다 더욱 더 애틋한 느낌을 준다. 오래된 철길의 양옆으로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옛 철길을 배경으로 인생 샷을 남기려는 연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함께 가면 좋은 곳…남원시립 김병종미술관
남원시립 김병종미술관은 2018년 3월 2일 문을 열었다. 남원 출신이자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유명한 동양화가인 김병종 작가가 기증한 작품을 바탕으로 건립됐다. 미술관은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기하학적 디자인과 계단식으로 내려오는 물의 정원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미술관 뒤편이 숲이어서 작품을 감상한 뒤 자연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미술관에는 모두 3개의 전시실이 운영되고 있다. 제1갤러리에서는 김병종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 순서대로 관람할 수 있다. 2, 3갤러리는 초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남원=글·사진 최병일 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