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화해의 봄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2편
맹렬한 추위 속에서 시작된 갑진년. 하지만 설 연휴가 지나고나니 어느덧 봄기운이 찾아들었다. 앞으로도 꽃샘추위 정도야 있겠지만, 혹한과 폭설 소식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올해 봄은 세계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는 분쟁과 다툼,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반복된 가족들 사이 불화가 깔끔하게 사라진 분홍빛 희망으로 맞이하고 싶은 게 사람들의 꿈 아닐지.
아래 차별과 갈등을 넘어 화해의 웃음으로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찾아보면 좋을 영화 2편을 권한다.
‘헤이트풀 8’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시점 무시로 드나드는 재기 발랄함
‘잔인함 속 폭소’ 불협화음 변주되는 수작
‘고령화 가족’
핏줄 아닌情으로 연결된 식구의 모습서
‘실패한 삶은 있어도 가치없는 생은 없다’
담담한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진실 전달
▲‘헤이트풀 8’..… 인종 차별의 갈등을 극복할 방법은 뭘까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장 많이 죽어나가야 했던 이유는 종교와 인종이 야기한 갈등 때문이었다.
가톨릭과 이슬람이 서로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는 것을 경쟁하던 중세로 갈 것까지도 없다. 1990년대 초반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던 발칸반도에서 벌어진 학살과 전쟁, IS(이슬람국가)의 테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 등은 대부분 종교의 다름을 이유로 자행된 반인륜적 행위.
히틀러가 일으킨 2차대전은 종교와는 다른 이유로 수백만 명의 목숨이 사라진 사례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조그만 독일 사내는 인종적 배타성을 정치적 헤게모니를 얻는데 사용했고, 아리안족이 아닌 다른 인종을 학살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알다시피 유대인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2차대전 이전, 인종차별이 비극적 현실로 첨예화돼 나타난 것이 미국의 남북전쟁 (1861~1865)이다. 이 전쟁이 발생한 가장 큰 이유는 “흑인 노예의 신분을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할 것인가”였다.
노동집약적 산업이 주류를 이루던 미국 남부는 저임금으로 수월하게 다룰 수 있는 흑인 노예가 유지되길 원했고, 반면 공업생산 기반이 발전일로에 있던 미국 북부는 ‘노예 해방’이란 휴머니즘을 지지하는 쪽이 많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만든 ‘헤이트풀 8’의 시간적 배경은 남북전쟁 직후다. 타란티노 감독이 이전 영화들에서 보여준 끔찍한 유머와 피와 살점이 튀는 연출은 이 작품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헤이트풀 8’은 뭔가 조금 다르다. 그게 뭘까?
영화 도입부. 카메라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조각상을 오랫동안 비춘다. 저 멀리 그 조각상의 뒤편에서 설원을 달리는 마차. 거기엔 자신이 인식하건 그렇지 않건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백인 악당들이 타고 있다.
이어 등장하는 화면은 흑인 현상금 사냥꾼(사무엘 잭슨 분)이 ‘교수형 집행자’로 불리는 백인 현상금 사냥꾼(커트 러셀 분)의 마차를 얻어 타는 장면이다. 흑인 현상금 사냥꾼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지휘관으로 백인 병사 수십 명을 불태워 죽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백인 악당들과 이들 두 현상금 사냥꾼이 만나는 곳은 눈보라 치는 허허벌판의 조그만 식당. 그런데 이게 무슨 일? 거기엔 북군 흑인병사 수백 명을 살해한 남부군 전직 장교(브루스 던 분)가 앉아 있다.
‘헤이트풀 8’은 예전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가 보여준 시간과 시점을 무시로 넘나드는 재기발랄한 연출에 더해 ‘잔인함 속의 폭소’라는 불협화음이 변주되는 수작이다.
‘관객이 열광하는 영화’가 뭔지 아는 감독이 지휘하는 감각적 즐거움이 있기에 3시간에 가까운 긴 상영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
여기에 하나 더.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에게 덧씌워진 ‘철학 부재의 천방지축’ 이미지를 불식시키려 한다. 미국의 악질적 고질병인 흑백갈등 문제를 진지하고 은유적으로 제기함으로써.
영화에서는 “신은 흑인의 편도, 백인의 편도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에선 타란티노 특유의 장황하고 우스꽝스런 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도입부, 지루했던 예수상을 비추던 장면도 그때가 되면 이해된다.
‘헤이트풀 8’은 너나 할 것 없이 일생 나쁜 일만을 저질러온 이들의 피 튀기는 복수극으로 단순하게 해석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죽음을 눈앞에 둔 백인우월주의자와 흑인우월주의자가 나란히 누워 누군가의 편지를 읽는다.
그 누군가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 편지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바로 이 장면이 이전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와 향후 그의 영화를 구별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될 듯하다.
▲‘고령화 가족’… 불화 이기는 힘은 결국 식구의 정(情)
‘만다라’와 ‘길’을 쓴 소설가이자 우리말 연구자였던 김성동(1947~2022). 그는 가족(家族)은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일본식 어법이기에 식구(食口)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식구란 무엇인가? 누구나 알 수 있는 2개의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먹는 입’이다. 이를 확장해석 하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이 될 터.
맞다. 아버지와 엄마, 아들과 딸, 조부와 조모, 숙부와 조카 등은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같은 집안의 혈족으로 해석 가능한 가족과 달리 식구는 꼭 같은 핏줄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혈통의 순수성을 중시해온 동양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족이 아닌 식구라는 단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한국인이 그렇게 꽉 막힌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이 문제는 역사학자나 언어학자들이 보다 면밀하게 연구해야 될 사안이니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파이란’과 ‘역도산’ 등의 영화를 통해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의 재주를 보인 송해성의 작품 ‘고령화 가족’은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꾼으로 문단 안팎에서 이름이 높은 천명관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송해성과 천명관이 그려놓은 영화와 소설 속 주인공 가족(식구)은 거칠게 말하면 ‘개판 5분 전’인 동시에 속된 표현으로 ‘콩가루 집안’이다.
40대 중반에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장남 오한모(윤제문 분),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지만 변변치 않은 재주 탓에 영화판에서 쫓겨난 차남 오인모(박해일 분),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을 꿈꾸는 천방지축 막내딸 오미연(공효진 분), 여기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남학생들과 몰려다니며 가출을 일삼는 오미연의 중학생 딸(진지희 분), 일흔을 목전에 둔 나이에 자식들 창피하게 혼자 사는 동네 할아버지 방을 드나드는 엄마(윤여정 분)까지.
영화는 이들이 왜 이런 삶을 살게 됐는지 설명하는 과정을 담았다. 사실 인간이 처한 입장과 지나온 삶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 그건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이 다르지 않다.
‘고령화 가족’은 얼핏 비루해 보일 수 있는 실패하고, 고통 받고, 초라한 생을 살아온 한 식구의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댐으로써 ‘실패한 삶은 있어도 가치 없는 생이란 없다’는 진실을 담담한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연출 기법이 할머니의 옛이야기 같은 방식이라 정감도 더해진다.
여기서 배우 윤제문은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그의 캐릭터 소화력은 ‘비열한 거리’ ‘이웃집 남자’ 등의 영화를 통해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공원에서 노인들을 따라 에어로빅을 추거나 훨씬 어린 건달 후배 앞에서 의도적으로 으스대며 폼을 잡는 장면, 엄마 역을 맡은 윤여정과 하모니를 이루는 철없는 늙은 아들의 모습은 영화 속 인물 오한모와 완벽하게 합치를 이루는 경지를 보여준다.
사실 연기라면 차남 역할을 맡은 박해일이나 철부지 딸을 소화한 공효진도 여타 배우들에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나, 원체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윤제문 탓에 두 사람의 연기력이 영화의 배경 뒤로 밀리는 느낌까지 든다.
윤제문의 연기와 송해성의 연출이 가닿은 끝. 영화는 이 5인 가족(혹은 식구) 출생의 비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들 모두는 핏줄이 아닌 정(情)으로 연결된 구성원이었다는 게 자연스레 밝혀지는 것.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 언급은 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다. 결국 식구란 즐거움과 웃음의 공동체라기보다는 ‘눈물과 수난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동아리’ 같은 것이었다.
앞서 말했다. 가족이 같은 집안의 혈족이라는 개념이 강한 명사라면, 식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이란 뜻을 품은 단어.
영화를 마주한 관객들이라면 왜 이 영화의 제목으로는 ‘고령화 가족’이 아닌 ‘고령화 식구’가 더 어울리는지 깨닫게 될 게 분명해 보인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