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면서 신비체험을 할 때가 있다. 마음이 환하고 깨끗한 사람은 세상을 상세히 알지 않고도 꿰뚫어 보고, 이 세상을 하나로 삼고 그 하나 너머의 빛을 맞아들일 수 있다. 세속 잡사에 휘둘리기 쉬운 체질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짧은 인생을 덧없이 보낸다.
나는 후자 쪽의 유형에 가까운 사람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학생 시절은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 신문마다 목소리가 하나로 다르지 않은 것을 가판대에서 이 신문도 사보고 저 신문도 사보며 같은 기사를 혹시 조금이라도 다른 어조가 있을세라 반복해서 읽곤 했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나는 여전히 뉴스에 목말라 있다. 정치적 진실이 언론들이 전달하는 것에서 늘 멀리 있음을 알기에 홍수같이 밀려드는 뉴스의 숲속을 헤매며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제대로 전하는 곳을 찾아 헤맨다.
그런데 최근 어느 날이다. 늘 늦게 자는 버릇에, 몇 번씩 깨는 습벽으로 나의 잠은 아주 저질스럽다 하겠는데, 그날 새벽 문득 깨어나니 머릿속이 한없이 깨끗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아무런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좀 더 시간이 흘러 정신이 돌아오면서, 이제는 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흘러들었다. 일간신문의 정치면에 거리를 두고 내 몸속에 흐르는 삼십 년 단위, 백 년 단위, 천 년 단위, 만년 단위의 시간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야겠었다.
그러고 보면 ‘나’라는 존재는 세속적인 차원의, 인간학적인 차원의, 생물학적인 차원의, 그리고 우주적인 차원의 삶, 생명이 흘러가는 전도체와도 같은 것을, 저 칼 융의 ‘원형 상징’에 관한 책을 읽고 그토록 깊은 감화를 받고도 나는 여전히 풍진 속을 헤매며 살아가고 있다.
젊은 날 칼 융의 ‘무의식’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국문과 대학원생 연구실을 내려와 저녁 어스름 빛을 받으며 학교를 내려가는데, 갑자기 세상이 ‘블루’하게 보였다. 마음속의 무의식이 세상에 마치 블루한 필터를 끼워 놓은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신비스러운 푸른 빛을 발산하는 것이었다.
그 융은 그때 책에서 말했다. 무의식은 어둠만 아니라 빛으로도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들 무의식에는 저 인류의 시원으로부터 쌓여 온 삶의 온갖 기억과 자혜가 저장되어 있다고. 이제는 정말 그 모든 시간들을 함께, 아울러 의식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새해를 앞뒤로 하여 이 나라에는 사람들 마음을 흔드는 큰 사건들이 많았다. 너무나 잘 알려진 스님의 돌연한 입적, ‘기생충’과 ‘나의 아저씨’로 사람들 심중에 깊이 들어온 연기인의 죽음, 또 갑작스러운 정치인 피습 사건. 모두 삶의 덧없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삶의 더 깊은 차원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차원 다른 여러 시간들이 내 몸에 흐르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더 여유 있게, 더 정갈하게, 더 고요하게 살아가고 싶다. 사람의 삶은 찰나의 빛과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