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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서정

등록일 2023-11-21 18:23 게재일 2023-11-2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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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며칠 간 바싹 추워진 날씨 탓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눈이 귀한 부산에선 11월에 첫눈이 내리고 전국 곳곳에 얼음이 얼면서 절기의 명분(?)을 찾기라도 하듯 세찬 강풍이 옷깃을 여미게 하고있다. 단풍이 채 들지 못해 푸르뎅뎅한 잎새들은 화들짝 놀라며 돌풍에 시달리다가 떨어져 포도 위를 뒹굴고, 사람들은 두꺼운 옷차림에 종종걸음으로 흩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하나씩 정리하고 점검하며 겨울채비를 하는 미틈달의 오후 햇살이 갈수록 짧아지고만 있다.

긴 목을 뽑아 바람에 서걱이는 억새는 가을을 보내는 아쉬움인지 겨울을 맞이하는 환호인지 일제히 은빛 손을 흔드는 듯하다.

산자락에서 파도의 외침으로 일렁이는 은빛 여울은 조락(凋落)의 스산함을 달래주고, 바람 결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풍엽(楓葉)의 군무는 한껏 만추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성장하여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익게 하고는 스스럼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계절, 늦가을은 늦지 않았고 그것이 또 무슨 거리낌이 있을까(晩秋不晩 又何妨). 처음과 시작을 위한 순환과 설렘의 만추가 아닐 듯싶다.

높은 가지에 듬성듬성 매달려 대롱거리는 감들이 대낮에도 주홍빛 전등을 켜며 떠나가는 가을날을 배웅하는 듯하다. 떫고 신산했던 인고의 시간을 지나 속까지 정갈하게 채워가고 익어가면서 가을날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까치밥으로 남겨진 몇 개의 감들은 배려와 공생의 매개 마냥 환하고 넉넉하기만 하다.

작은 것 하나라도 아끼고 나누면서 베풀고 챙겨줄 때 한결 온기가 스미고 아름다운 향기가 피어날 것이다. 온갖 자연에 나타나는 현상이나 세상살이의 천태만상이 별반 다르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수확을 끝낸 들판엔 텅빈 충만이 서리는 것 같다. 푸르름과 황금물결로 일렁이던 논배미엔 어느새 ‘볏짚 원형 곤포 사일러지’가 휑해진 들녘을 일명 ‘공룡알’이 심심찮게 지키고 있다. 들판 군데군데 움막처럼 봉긋하게 쌓았던 예전의 짚가리가 요즘엔 ‘마시멜로’같은 사일러지로 변모하여 뒹굴고 있으니, 이 또한 이색적인 가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이처럼 바뀌고 변하면서 세월의 바퀴가 굴러가는 것이리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나태주 시 ‘11월’전문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세상에 나눠줄 것이 많다는 듯이 헐벗은 몸이 되면서까지 나뭇잎을 하나씩 아래로 떨구어 낸다. 예쁘게 물든 단풍이 짐짓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11월,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낙엽의 이불’처럼 비우고 베풀며 내려놓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석지고 그늘진 곳의 따스한 이불이 될 수는 없을까? 더 많이 사랑하고 정을 나눠야 할 1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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