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대부분의 신조어와 줄임말은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다. 그 뜻과 유래를 애써 찾아보지 않으면 추측조차도 어려운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중꺾마’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라는데, 힘들거나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할 때 이 말을 많이 쓴다고 한다. 순간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나아갈 때 어울리는 말이지만, 삶의 전반을 두고 보더라도 이 말은 의미가 작지 않을 것이다.
경북 의성 출신의 고송(孤松) 신홍망(申弘望·1600~1673)은 1639년(인조 17) 40세 때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는 1652년(효종 3) 7월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어 부임했는데, 당시 이시매라는 인물이 올린 상소를 두고 취했던 행동이 발단이 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 사건의 정황은 다소 길고 복잡하다. 그러나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이시매의 상소 내용에 선현(先賢)을 모욕한 표현이 있어 논란이 일었고, 이에 대해 신홍망이 분개하면서 일반적인 상소 처리 규정을 따르지 않고 독단으로 임금에게 논계(論啟)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신홍망은 사간원의 논박을 받고 파면당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중앙에서는 이 논란이 종식되지 않고 지속되면서 결국 유배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곧 ‘장사일록(長沙日錄)’이다. 일기는 압송이 시작되는 1652년 10월 9일부터 시작해서 해배되어 집으로 돌아온 12월 21일에 끝이 난다. 일기 앞부분에 본인의 유배 경위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신홍망은 당시 사건을 스스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평생에 다른 재능은 없고 다만 ‘삼가고 조심함(愼重)’을 첫 번째 공부로 삼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게 되어 이시매의 상소문에서 선현을 욕보이는 도리에 어긋난 말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나서서 독단으로 논계했고, 위로 성상의 위엄을 범해 끝내 먼 변방으로 귀양 가는 화를 당하였다.”
- 신홍망의 ‘장사일록’ 중에서
신홍망은 자신이 독단으로 계문을 올리려고 할 때 동료가 성급함을 지적하며 만류했던 것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동료가 이시매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굳게 만류하면서 ‘그대는 이미 홍문록(弘文錄)에 이름이 올라 있소. 듣자니, 이조(吏曹)에서 내일 정사(政事)를 열어 그대를 교리(校理) 제1후보로 추천하려고 한다는데, 어찌 성급하게 처신하려 하시오? 이 계문(啓文)이 한 번 나가고 나면, 벼슬길은 여기서 막힐 것이오.’라고 하였다. 나는 웃으면서 ‘세상의 영욕(榮辱)은 정해진 몫이 있는데, 내 어찌 얽매여서 끌채 밑의 망아지같이 행동하겠소?’라고 하고, 피사(避辭)<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를 먼저 제출한 후 잇달아 탄핵 상소를 올렸다. 독단으로 계문(啓文)을 올리는 것이 규정을 벗어나는 일임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부득이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신홍망의 ‘장사일록’ 중에서
신홍망은 유배형이 떨어져 유배길에 올랐지만 한성으로 압송되는 도중 감등부처(유배지의 등급을 낮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후 대신들이 부처환수(유배형을 거두어들이는 것)를 지속적으로 요청하였으나 효종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 등 조정에서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긴 시간 동안 홍제원에서 명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평해로 유배지가 결정되었고, 신홍망은 서둘러 한성에서 평해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몸이 무슨 까닭으로 이런 아득히 먼 하늘 끝, 땅 모퉁이에 떨어졌는가. 답답한 마음 누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먼 변방 벽동(碧潼)으로 귀양가는 것에 비하면, 비록 남방 외진 고을의 음습한 바닷가라도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테니 다행이다. 불행한 고비가 닥치면 사람이 피하기 어려운 법이지만, 군자는 거처함에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편안하게 여길 것이니 어찌 귀양살이의 괴로움이 나의 마음을 얽어맬 수 있겠는가.”
-신홍망의 ‘장사일록’의 일기 중에서
신홍망은 스스로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이 사건에 휘말려 유배까지 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곧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 미래를 알 수 없었기에 신홍망은 어쩔 수 없이 중간중간 괴롭고 복잡한 마음을 표출했다. 식구들이 슬퍼할 때, 유배형이 확정되었을 때, 유배지를 향해 이동할 때 마음이 울적하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외부의 시련에 자신의 신념이 꺾이지 않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