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에 즈음해서 봄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온갖 꽃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울긋불긋 피어나고 새들은 나무를 새장 삼아 정답게 지저귀는가 하면, 부드러운 바람 결에 실버들은 연둣빛 머리채를 하늘하늘 풀어헤치고 있다. 메마른 땅에 어김없이 생동의 기운이 스며들어 그야말로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나날이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의 정취와 향기를 이제는 마스크 없이도 느낄 수 있다니, 실로 얼마만에 누려보는 봄날의 환희이던가.
불과 4년 전의 겨울에 들이닥친 코로나19는 얼마나 위협적으로 지구촌을 옥죄여 왔던가. 조마조마한 가운데 초기의 확진자는 무슨 죄인(?)이라도 된 양 멸시와 냉대 속에 적개심마저 불러 일으키게 했고, 언제 걷힐지 모를 암울의 장막같은 불안과 침체의 늪에 허우적거리며 공포와 조바심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언 땅에도 봄이 찾아들듯이, 끝이 보이지 않던 괴질의 아귀도 이제는 한 때의 고질(痼疾)로 여길 수밖에 없을 듯하다.
올해 들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율의 확연한 감소세로 팬데믹의 긴 터널을 벗어난 듯해 사뭇 서로가 따뜻한 위로와 공감으로 다독이고 챙기며, 병은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재삼 되새기게 된다.
어쨌든 코로나 이후 세번째의 봄날이 왔고, 좀 늦긴 했지만 감염병의 소멸추세에 사람들은 조금씩 안도와 평온의 일상을 되찾아가는 듯하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꿈결 같고 한 순간 같다지만, 희대의 코로나19는 혹독한 시련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팬데믹과 네트워크상의 소통, 공유 증가로 우리는 점점 직접 마주하는 기회가 줄어드는 비대면 문화와 일방적인 대화, 표현에 익숙해지는 듯하다. 그것은 어쩌면 건조한 듯 단순해 보이고, 당연한 듯 무관심에 주눅들어가는 개인화와 비정(非情)의 사회를 연상시키는 모종의 딜레마에 감염된 것이 아닐까 싶다.
‘春日短/幷且去/吾君邪/頻相處(봄날은 짧다/그리고 간다/우리 그대여/자주 만나자)’- 강성위 한시 단가(短歌) 致君(그대에게) 전문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난다. 광대무변한 우주에 지구는 한 개의 점이나 티끌에 지나지 않고, 한철이나 한 시대는 유구한 세월 속의 창해일속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만큼 길거나 크게 보면 현재와 맞닥뜨리는 일련의 현상은 한때의 미약한 움직임이고 아주 소소한 변화나 진배없을 것이다. 그에 비춰 보면 지겹기만 했었던 악몽 같은 코로나의 엄습도 ‘한때의 신음’ 정도가 되지 않을 듯싶다.
3년만에 봄다운 봄을 푸근하게 맞이할 수 있음은 그만큼 억눌리고 발목 잡힌 누림의 결핍이 컸었기 때문일 것이다. 묵묵히 참으며 오랜 기다림이 있었기에 새롭게 맞이하는 봄날이 한결 따사로운지도 모른다. 짧기만한 봄날이지만 마음껏 즐기고 누리면서 분출되는 욕구를 구가하는 것도 괜찮을 일이다. 뜸해졌던 만남의 물꼬를 흔쾌히 트며 피어나는 봄꽃 마냥 환한 웃음꽃을 피워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