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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태극기가 펄럭이는 곳, 3월엔 만세시장에 가자

김순희 시민기자
등록일 2023-03-07 18:47 게재일 2023-03-0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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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장엔 늘 태극기가 펄럭인다.
만세시장엔 늘 태극기가 펄럭인다.

3·1절이 지난주였다. 어릴 적 3월의 첫날이면 어김없이 불렀던 노래가 떠오른다. 학교에 가서 기념식을 했기 때문이다. ‘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태극기 곳곳마다 3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지금은 학교에서 3·1절 기념식을 하지 않나 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이 노래를 모른다고 하니 말이다. 그저 하루 쉬는 휴일이 된 것 같아 아쉽다.

휴일이면 오일장 나들이를 가곤 한다. 여러 시장 중에 영해 오일장을 자주 가는 이유는 시장 이름이 특이해서다. 만세시장. 1919년 이곳에서도 만세 소리가 크게 울렸다고 해서 장터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고, 장이 서는 곳이라 터가 넓기도 했을 것이다. 만세시장 장터에 늘어선 가게 간판도 ‘만세 ○○○’이라고 붙은 집이 여럿이다. 아예 ‘3月 18日’이란 카페도 있다. 이렇게라도 그날을 기리는 것은 큰 의미가 있어 보기 좋은 현상이다.

3·1운동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해 입소문을 따라 지역으로 퍼졌고, 포항은 3월 11일 포항면 여천장터 현 육거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그렇게 9회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사망자 40명, 3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3월 22일 장날에는 청하장터에서 23인의 애국지사께서 선봉에 선 만세운동이 있었다. 기념탑은 보경사 입구에 세워졌다. 북구 송라면 대전리에 ‘대전 3·1의거 기념관’은 항일 운동의 유품, 판결문, 영정 등 후손들이 소중히 간직해온 102점이 전시되어 있다.

3월 18일에 일어선 영해 만세운동에 대해서는 영해면사무소 앞에 입간판으로 세워 놓았다. 처음에는 비폭력 평화적 시위로 시작했으나 일본인 경찰의 자세 때문에 점차 서로 폭력적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하며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한다. 맞은편에 조선 시대 영해부의 관아를 복원한 건물이 섰다. 이곳은 경상북도 동북부지역의 중심지였고 수많은 관아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0년 일본에게 나라의 국권을 빼앗기고 난 뒤에 우리 민족의 정기를 누르는 목적하에 일본이 영해 읍성과 관아건물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웅장했던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나중에 영덕군에서 건물의 형태가 그나마 남아 있는 책방 관사를 복원시켜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책방은 지금 기준으로 기초 단체장의 비서실장이라고 한다.

바로 근처에 일제강점기 때 금융조합 건물이 있다. 1935년에 세워졌는데 바로 앞 영해파출소와 더불어서 만세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곳으로 당시 유행하였던 모더니즘 양식으로 건축했다. 입구 계단과 창문을 콘크리트로 막아놔서 내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군산에 갔을 때 비슷한 건물이 전시관이나 카페로 꾸며져 사람들이 많이 찾도록 해서 보기 좋았었다. 복원돼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한적한 이 거리가 북적거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외에도 거리 곳곳에 일제강점기 때에 세운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앞은 상가이고 뒤쪽은 살림집으로 쓰던, 말하자면 주상복합 건물이다. 영해 3·18 만세운동 기념 사업소가 있고 시장 로터리에 기념탑도 있어서 차를 타고 탑 주위를 돌아 나가야 한다.

조선 후기까지 영덕과 영해는 각각 별개의 군이었다. 1914년 일제는 영해를 영덕군에 통합해버렸다고 한다. 번성했던 영해가 영덕군에 통합된 이유는 이곳에 퍼져있던 항일투쟁 의식을 꺾기 위해 면으로 격하시켰다고 한다. 영해라는 말은 ‘잔잔한 바다’라는 뜻이다. 이 잔잔한 곳이 3월이면 만세 소리로 가득하다 하니 가까운 날에 찾아가서 함께 태극기를 흔들어 보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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