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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 보다는 ‘힘 빼’

등록일 2023-01-31 18:17 게재일 2023-02-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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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속도로 파도를 즐기며 자연스럽게 유영하는…. /언스플래쉬

설 연휴가 지나고 남은 건 2023년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다. 이젠 꼼짝없이 새로운 해를 온몸으로 맞이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도 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깊어진 주름을 보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사촌 동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다.

누군가가 봤을 때 나 역시도 어느 부분이 훌쩍 지나있겠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떤 변명도 불필요해진다. 2월의 문턱 앞에서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서 있다.

정말이지 작년은 바빴고 나 자신을 살피기는커녕 방치와 학대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었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지난 몇 년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에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삶을 제대로 운용하고 싶었다. 글을 쓰고 일을 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을 탐닉하려는 마음으로 경주마처럼 뛰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에도 쉽게 지쳤고 가까운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에도 다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힘들다는 핑계로 눈앞에 놓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다른 것보다 마감 날짜를 넘기는 일이 가장 싫었다. 소설을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아 새벽에 기상해 컴퓨터를 켰고 퇴근 이후에는 쓰러지듯 잠들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은 늘 부스스했고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위경련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응급실 문을 두드리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물론 무언가를 탓한다면 탓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웠다기보다는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아진 것에 가까웠다. 어떠한 압박과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주변에 떠도는 무수한 언어를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싶었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생각한다.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고. 불필요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힘을 빼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습작생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힘 빼’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비문을 조심하라는 말이나 소설의 구성을 살펴보라는 등의 구체적인 조언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힘을 빼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모호했으며 은근히 기분 나쁘기까지 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소설을 쓰는 나를 응원하며 ‘힘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실질적인 조언이었다. 뭔가를 많이 바랄수록, 어떤 일에서 잘하려고 할수록, 글에도 삶에도 계속해서 힘이 들어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억지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힘껏 세상을 정의 내리려 하면 글도 삶도 이상한 방식으로 무너지는 것이었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아무런 의도도 갖지 않고 찍는 마침표도 존재할까. 나는 뭔가를 간절히 바랐기에 더욱 애를 썼다. 이제 그것은 작년의 나로 남겨두기로 한다. 절대 무의미한 몸짓이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맘껏 달려봤으니 오히려 개운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힘을 빼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수영장에서 그렇다. 발이 닿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러면 몸은 무거워진다. 팔다리를 허우적댈수록 더욱 가라앉을 뿐이다. 온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숨을 쉬다 보면 신기하게도 몸은 물 위로 둥둥 뜨기 마련이다.

요가 동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을 억지로 구부리거나 힘을 주어 어떤 자세를 만들려고 하면 자칫하다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들숨과 날숨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중력의 무게가 느껴지면서 자세가 만들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힘내’라는 말보다 ‘힘 빼’라는 말이 듣고 싶은 새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힘을 주고 태어나 힘을 빼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조한 마음으로 동동거리면 무자비하게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이젠 알고 있으므로. 거대한 배를 만들어야만 세상이라는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맨몸으로도 얼마든지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다. 나만의 속도로 파도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유영하는 때가 오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언제가 됐든 기쁘게 기다릴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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