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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환상

등록일 2023-01-31 18:17 게재일 2023-02-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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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날 때 필요한 건 삶을 바꿔 주리란 환상을 깨는 것이다. /Pixabay

사실 나는 유행하는 드라마는 꼭 그 시기를 놓쳐서 보게 된다. 괜히 호들갑 떨기는 싫고, 그렇다고 재밌다는 데 안보기도 그렇다보니 꼭 시기를 한참 놓쳐서 보게 된다. 물론 프리랜서라는 직업 탓에 제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려워서 그런 탓도 있지만, 괜히 덩달아 사람들의 유행에 합류하기도 싫고, 그렇게 덩달아 보기시작하면 꼭 “이번 주 xx화 봤어?! 대박!”이라며 공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봤어! 완전 대박!” 하면서 같이 호들갑 떨어주는 게 서툴러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재밌는 걸 놓치긴 싫어서, 비수기 때면 나는 종종 여러 시즌짜리 드라마도 하루 종일 틀어놓곤 한다. 강의도 없고 나갈 일도 없이 집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냥 하릴 없이 드라마를 켜놓고는 그 앞에 노트북이며 담요며 커피며 생강차며 과자며 사탕이며 온갖 것들을 부려놓곤 일도 하고 빨래도 개고 괜히 먼지도 닦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번 방학엔 ‘나의 아저씨’를 하루에 한 편 정도씩 아껴가며 보고 있다. 처음엔 그냥 생각 없이 틀어놓고 있다. 보다보니 묘하게 이선균과 아이유 양쪽 모두에 공감을 하며 보게 되었다. 어렸을 적 빚쟁이에 시달려본 기억이라거나(이건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모르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마저도 이유도 없이 무서워하거나 증오하게 되는 경험이란), 혹은 한 가족의 아들이자 가장이 견뎌야 하는 마음의 무게라거나.

이제 방영한지도 오래인 드라마라 조금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나는 이 드라마가 생각보다 깊고 어두워 조금 놀랐었다. 다른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철없는 척을 통해 감당하고 겪어내고, 때로는 이겨냈던 것과 달리 주인공인 두 남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감내하며 살아왔다는 점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쩌면 다른 인물들의 철없어 보이는 모습이, 두 사람을 더 극단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보기엔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면의 구조는 동일해 보였다고나 할까.

인상적이었던 건 두 사람의 모습 뿐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향한 타인의 시선과 말들도 다른 의미로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너는 항상 속 깊고 타인을 위하며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지’라는 타인의 무의식적인 기대도, ‘너는 원래부터 질도 안 좋고 태도도 불량하니 앞으로도 그렇겠지’라는 타인의 태도도, 겉보기엔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너는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한다’라는 압력처럼 느껴졌다. 그런 타인의 태도마저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삶의 일부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두 사람이기에, 그토록 서로의 속내를 깊게 알아차리며 서로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겐 조금 개연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겠지만, 아마 나처럼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슬픈 건, 두 사람이 깊고 너른 행복을 맞이하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아직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해 속단할 수는 없는 이야기겠지만, 왠지 두 사람이 끝내 마주하게 될 엔딩이라는 건 기껏해야 평범한 삶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여전히 특별하고 각별해 보이는 건, 둘 모두 타인이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환상 없이 서로를 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기분을,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의 색채를 바꿔줄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그 생각이 서로를 향해 드러나는 순간, 기대는 압박으로 바뀌고 관계는 비틀리기 시작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정말로 필요한 건, 누군가 나의 삶을 뒤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를 통해 사람을, 인생을 배운다는 게 좀 허황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한결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종종 우리의 다툼과 불화란,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나의 너무 높은 기대 탓에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니까. 누군가 보기엔 두 사람이 타인에 대한 기대 없이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메마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배려를 위한 가장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이 드라마의 끝을 알지 못하지만, 그런 두 사람이기에 적어도 서로를 원망하게 되거나 파국을 맞이하게 되거나 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물론 이건 드라마니까,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겠다. 작가도 사람일 테니 나도 기대를 좀 내려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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