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나폴리’ 멋과 맛이 넘치는 통영으로 간다
경상남도 통영은 한려수도의 비경과 항구의 낭만을 품은 도시다. 바다의 아름다움 말고도 섬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겨울이면 통영 바다는 황금빛 논처럼 무르익는다. 제철을 맞이한 바다생물의 맛이 한껏 오른다. 한적한 갯마을과 아늑한 포구, 푸른 바다 위에 산수화처럼 떠 있는 섬들, 넘쳐나는 싱싱한 해산물 등 멋과 맛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통영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여행의 출발점인 중앙동 강구안
펄떡거리는 활어·싱싱한 해산물
보는 것만으로 흥 올라 사람 북적
동피랑 구불구불 미로 따라가면
숨겨진 선물 색색의 벽화 기다려
추위 녹이는 겨울별미 물메기탕
코스요리 즐기듯 ‘다찌’서 배 채워
바다 가로질러 닿은 욕지도에는
번성했던 옛 흔적 고스란히 남아
갓 잡아먹는 지역 명물 고등어회
특산물로 만든 고구마라떼 인기
통영의 멋,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강구안
통영시 중앙동의 강구안은 통영 여행의 출발점이다. 포구 앞 거리에는 저마다 원조임을 자랑하며 간판을 내건 충무김밥집, 꿀빵집이 늘어서 있다. 커다란 고무대야 안에서 펄떡거리는 볼락, 도다리, 도미 같은 활어와 굴, 해삼, 멍게, 전복, 소라 같은 싱싱한 해산물이 넘쳐나는 중앙시장도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흥이 나는, 통영 바다를 통째로 들여놓은 시장은 통영에 온 사람이라면 너나 할 거 없이 들르는 명소다. 그런 이유로 강구안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활기차다. 항구를 따라 시끌벅적 사람 냄새 물씬 풍긴다.
중앙시장 뒤쪽, 강구안에서 올려다보면 가파른 언덕 위에 옛집들이 촘촘하게 남아있다. 동피랑 마을, ‘동쪽의 피랑(벼랑)’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통영항과 중앙시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거주하기 위해 만든 동네다. 구불구불 미로 속을 걷듯 좁은 골목을 따라가면 시린 세월에 침식돼 허름해진 담벼락에 화가와 시민들이 아기자기한 벽화를 그려 넣었다. 고단한 삶이 담긴 달동네 골목을 통영의 새로운 명소로 만들었다. 골목에 펼쳐진 온통 푸른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며 고래의 꿈을 키운다. 희망을 담은 벽화는 2년마다 열리는 공모전을 통해 새로운 벽화로 교체된다.
동피랑마을 꼭대기에 오르면 강구안과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항이 시원하게 내다보인다. 바다마을 감성으로 무장한 카페에서 포구의 잔잔한 바다를 바라본다. 백석의 시 ‘통영’의 한 구절처럼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나가고 싶은 곳’이다.
통영의 맛, 겨울에 제맛 나는 물메기와 다찌
통영의 맛은 겨울에 깊어진다. 추운 계절이면 통통하게 살이 올라 향이 진해지는 통영굴과 물메기가 제철을 맞는다. 동해안의 곰치와 사촌쯤 되는 물메기의 본명은 꼼치다. 예전에 쓸모없는 고기라 여겨 그물에 걸리면 바다에 내던졌던 물메기는 김치를 넣어 빨갛게 끓이는 동해의 곰치국과 달리 맑은 탕으로 끓여 깔끔하다. 살점이 흐물흐물해 입안에서 호로록 넘어간다.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서호시장과 중앙시장에 물메기 맛집들이 모여 있다.
해산물이 풍성한 통영에서 다찌를 빼놓을 수 없다. 술값에 안주가 포함된 일본 선술집인 ‘서서 마시는 술집, 다찌노미’에서 유래된 말로 다찌집에서 싱싱한 회와 해산물을 코스 요리처럼 맛볼 수 있다. 정해진 메뉴 없이 그날그날 들어온 제철 생선과 해산물로 회, 구이, 무침으로 다양하게 요리해 한상을 가득 채운다. 천혜의 자연, 바다에서 나온 갖가지 해산물을 차례차례 맛보다 보면 통영 바다가 마냥 은혜롭기만 하다.
비경 품은 보석 같은 섬, 욕지도
통영 바다에 떠 있는 570개의 섬 중에서 유인도는 40개가 조금 넘는다. 연화도, 상노대도, 하노대도, 두미도, 초도 등과 함께 연화 열도를 이루고 있는 욕지도는 해안선 길이가 31㎞로 연화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통영항에서 뱃길로 32㎞, 망망한 바다를 가로질러 1시간 정도면 욕지도에 닿는다. 그림 같은 해안선과 바닷바람을 맞은 기암괴석이 매력적인 섬은 월척을 노리는 낚시꾼들이 사랑하는 곳이다. 바다 위에 불쑥 솟아오른 산이 있고, 숲에 비렁길이 나 있어 등산이나 트레킹하기도 좋다. 일주도로를 드라이브해도 낭만적이다. 여행의 모든 재미가 욕지도 안에 있다.
어촌 근대화의 발상지, 자부랑개
욕지항에 내리면 바로 만나는 자부마을, 자부랑개는 1910년대부터 욕지도의 중심이 됐다. 일제강점기 많은 어선과 어부들이 욕지항으로 밀물처럼 몰려왔다. 자부랑개에는 일제 집촌이 들어서고, 골목마다 어부들을 상대로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등 장삿집이 생겨났다. 소박한 어촌에 근대화의 물결이 들이쳤다.
남해와 통영 사람들이 욕지바다 때문에 먹고 산다고 할 만큼 욕지도에는 고기잡이가 성업했다. 겨울에서 봄까지는 도다리·감성돔·참돔·납새미(가재미)·나무쟁이(가오리)·쑤기미·낭태가, 여름에서 가을에는 고등어·전갱이·삼치·갈치가 주로 잡혔다. 계절에 상관없이 바다는 온통 멸치 떼였다. 전국의 배들이 욕지도에 겹겹이 정박했다. 잡은 물고기가 너무 많아 다 운반하지 못하고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황금어장이라 연중 파시가 섰다. 파시(波市)는 어류 등을 사고팔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이다. 좌부랑개어업조합에서 동촌까지 400m 해안길, 초롱불을 밝힌 야시장에서는 매일 물물교환이 이뤄졌다. 삶은 고구마, 호박, 남새 등과 교환한 물고기는 수집상에게 넘기기도 하고 집집마다 있는 간독에 염장했다. 일본사람들은 넘쳐나는 고등어를 일본으로 공수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계속되던 파시는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1970년대 삼치 파시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일제강점기 운영되던 당구장, 목욕탕, 고등어 간독 등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자부랑개 옛 흔적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욕지도 할머니들이 만든 마을기업 ‘욕지도 할매 바리스타’가 나온다. 할매들이 만든 쿠키나 고구마라떼를 맛보는 것도 욕지도를 여행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섬과 섬을 연결하는 욕지도 출렁다리
노적마을에서 혼곡마을로 이어지는 해변 트레일, 비렁길을 걷다 보면 바다로 난 바위가 펠리칸 주둥이를 닮아 펠리칸바위로 불리는 곳에서 출렁다리를 만난다. 소슬하게 부는 바람과 가벼운 발걸음에도 아슬아슬 출렁이는 다리 한 가운데서 비경이 펼쳐진다. 다리를 건너가면 너른 바위 너머 쪽빛 바다가 눈이 시리게 반짝인다. 아름다운 욕지도 풍경으로 첫손가락을 꼽는 삼여도도 보인다.
유동마을 근처의 삼여도는 지그재그로 굴곡진 절벽해안에 바짝 붙어 있는 세 개의 작은 바위섬이다. 온전한 세 섬을 보려면 삼여전망대로 가야 한다.
삼여도에는 전설이 담겨있다. 욕지바다 용왕에게 세 명의 딸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900년 묵은 이무기가 젊은 총각으로 변신했는데, 세 딸은 이무기 총각을 사모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용왕은 크게 노해 세 딸을 모두 돌로 변하게 했다. 화가 난 이무기 총각은 산을 부숴 두 개의 섬을 만들어 바다를 막아버렸다. 세 여인이 변한 바위는 삼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야기를 품은 바다, 섬 구석구석은 보석처럼 빛난다. 이 모두를 한눈에 담으려면 가장 높은 봉우리 천왕봉에 오르면 된다. 등산로를 따라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정상에 오르면 용머리처럼 뻗어나간 연화도, 우도 등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욕지도 명물, 고구마와 고등어회
욕지도는 섬 대부분이 비탈이어서 논농사가 어려웠다. 대신 경사를 일구어 밭을 만들었다. 물이 잘 빠지는 황토밭에서는 고구마가 잘 자란다. 농익은 욕지도 고구마로 앙금을 넣은 도넛과 고구마라떼는 통영 특산품으로 재탄생했다. 고구마만큼 고등어회도 유명하다. 서울을 비롯한 육지에서 맛보는 고등어는 그 출신지를 따져보면 대부분 욕지도산이다. 팔고도 남아서 염장할 만큼 고등어가 많이 나는 시절은 지났지만 욕지 앞바다 양식장에서 여전히 싱싱한 고등어가 나온다. 고등어는 갓 잡아 바로 회로 쳐야 비린 맛없이 달큰하다. 섬 앞바다에서 바로 건져 회로 나온 욕지도 고등어회는 차지고 달다.
섬의 하룻밤을 보내고 겨울 아침 해를 맞이한다. 수평선에 떠오르는 태양은 언제나 황홀하다. 풍요로운 통영 바다에서 힘차게 솟아오르는 붉은 해는 더 특별하다.
/통영=글·사진 이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