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상대의 말에 관해 곱씹고 생각해보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인다. 고치고 싶은 나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다.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대하는 나름의 배려일까. 혹은 생각의 편협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방어적으로 취하는 행동이 아닐까. 무엇이 됐든 나는 상대의 의견에 긍정하는 형태를 자주 취하고 돌아서면 매번 후회하기 일쑤다.
특히 그것이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될 내용이었을 때, 상대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면 안 되었을 때,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취한 단순한 행동이었을 때, 나는 나의 나약함에 무너지고 만다. 왜 면전에 대고 말하지 못하지? 그건 틀렸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무분별한 긍정과 무책임한 승낙 사이에 있는 건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려는 얄궂은 태도다.
모두와 다 잘 지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자꾸 행동하는 게으른 관성이다.
글을 쓸 때는 살짝 용감해진다. 몇 번이고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내 생각을 가장 가깝게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를 찾을 수 있다. 거칠고 뾰족한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나는 당연하게도 내 마음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내가 뱉어내는 이야기는 오해를 사기 쉽고 가장 싫어하는 나의 부분까지 들키고야 만다.
글이란 참 이상한 것이라서 교묘하게 돌려서 보여주려고 해도 결국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은근히 탓하는 마음까지도 드러나게 된다. 내가 적은 문장은 수정될 수 없으며 끝끝내 내 뒤를 따라다닌다.
어쩌면 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가닿은 언어는, 그것이 고약한 내용일수록,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미래의 나 역시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아서 나는 매일같이 나의 언어를 의심한다.
정말 그렇다.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쉬운 것이 없다.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데… 좀 더 뻔뻔해져도 될 텐데… 그게 어렵다. 긍정도 부정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노라면 한숨부터 나온다. 의도적으로 딱 잘라 선을 그어보아도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자기혐오의 일종일 수도 있고 흔한 자기 검열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분명한 태도를 해명하고 싶다는 욕구와 내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이불처럼 덮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어떤 면에선 필연적인 오독이 필요하니까. 단 하나의 오해도 없이 타인을 안다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누군가에게 나는 우유부단함으로 점철된 사람일 수 있고 불편하리만큼 내면을 보이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예리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또 그만큼의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다. 냉철하고 적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을 잘하는 부류가 있다. 딱 잘라 표현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운용한다. 어떤 것도 완전한 답이 될 순 없다. 자기 태도가 옳다고 믿어버리는 순간 찾아오는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적의 손을 동시에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답을 내리는 것을 유보하고 현상을 찬찬히 마주하려고 하지만 누구보다 성급하고 저돌적인 면이 있다. 모순으로 똘똘 뭉쳐있으나 그것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첨예하면서도 여유로운.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한. 그런 것이 어디에 있겠나 싶으면서도 또 아주 없을까, 골똘히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그것은 복숭아의 성질과 비슷하다. 복숭아라는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각각 고유의 특질을 지닌 맛 좋은 과일. 물복과 딱복이 섞인, 어떤 부분은 말랑하고 또 어느 부분은 단단한 그런 복숭아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이런 형태도 있는 거지.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깨닫는 것. 반성하고 후회하면서도 ‘나’라는 구심점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