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매년마다 ‘교내 구기대회’라는 학급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한 2주간 치러지는데 각 학년 결승전은 전교생이 다 나와서 관람하는 대형 이벤트였다. 구기대회 시즌이 되면 축구공의 PVC 냄새가 대기 중에 떠다녔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져 텅 빈 운동장에 가 혼자 연습하고 등교했다. 아직도 코끝에 희미하게 남은 축구공 냄새를 감각하면 가슴이 뛴다.
1997년, 1학년11반 대표로 첫 출전한 구기대회 1라운드 경기에서 나는 승부차기 실축이라는 대굴욕을 맛봐야 했다. 나 때문에 우리 반 탈락했다. 이를 갈고 칼을 갈고 발을 갈며 와신상담, 겨울방학 내내 볼만 찼다.
이듬해 우리 2학년3반은 플레이메이커 정찬범, 포워드 오조원, 라이트윙어 박찬영, 풀백 윤상호, 그리고 중원과 사이드를 오가며 중앙 침투도 하는 윙어 겸 새도우 스트라이커 이병철까지, 전력이 꽤 탄탄했다.
12강 1라운드, 5반과 붙었다. 수비 후 속공 상황에서 오조원이 중앙선 위로 치고 나가는데, 정찬범이 “병철아 같이 올라가줘” 외쳤다. 질풍처럼 달려 어느새 나란히 침투하는 중에 오조원이 내게 패스했고, 그걸 받아서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드리블해 골키퍼 키를 살짝 넘기는 아웃사이드 칩킥으로 골을 넣었다. 구기대회 첫 골이었고, 2002년 안정환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한 것보다 4년 앞선 감각적 플레이였다.
다음 6강 라운드에서는 1반의 내 친구 박진형과 공격수와 골키퍼로 마주하는 운명의 장난에 괴로웠으나 승부 앞에 우정 따위는 없었다. 문전 혼전 중 수비 맞고 굴러 나온 세컨드 볼을 박진형 가랑이 사이로 넣으며 친구에게는 굴욕을, 우리 반에는 승리를 안기는 결승골을 기록했다.
4강전, 아침부터 설사를 심하게 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연장전 끝에 0대 0으로 비겼고, ‘신이 만든 단두대’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1년 전 실축의 대굴욕이 PTSD가 될 법도 한데, 자신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 수없이 연습한 그 슛을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라. 1번 키커로 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발 인사이드킥으로 오른쪽 골망을 갈랐다.
대망의 결승전. 8반의 이홍규는 별명이 ‘야신’이었다. 인류가 축구를 시작한 이래 최고의 골키퍼라는 러시아의 전설 레프 야신을 방불케 했다. 오직 골키퍼 덕분에 결승까지 올라온 8반이었다.
전반전에 우리 반이 선제골을 넣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 리드를 지키던 후반전 중반, 상대진영 오른쪽 코너에서 박찬영이 땅볼 패스를 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외곽 20미터 지점, 굴러온 공을 힘차게 찬 내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
로켓처럼 날아간 공은 몸을 날린 야신의 장갑 위로 솟아 크로스바 밑동을 때리고는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구기대회에 푸스카스상이 있다면 무조건 수상했을 골이었다.
그해 가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대표로 내가 상장을 받았는데 상장에 내 이름이 적힌 걸로 보아 아마도 내가 대회 MVP인 게 분명했다. 이듬해 3학년 대회에서도 두 골을 넣었는데, 한 골은 중앙선 부근에서 상대 골키퍼가 나온 걸 보고 롱슛을 한 게 들어갔고, 또 한 골은 후방에서부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폭풍 드리블을 해 강력한 땅볼슛으로 왼쪽 골망을 갈랐다.
요즘 손흥민이 그걸 좀 비슷하게 찬다. 그때 인근의 봉천여중 애들이 내가 축구하는 걸 보러 왔다. 남녀공학을 다녔라면 90년대 농구대잔치 연세대 우지원 인기는 그냥 능가했을 것이다.
그 시절 축구는 우리들의 ‘세계’였고, 구기대회는 월드컵이었다. 나는 봉천중학교 구기대회에 통산 3회 출전해 7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였다. 그 모든 골 장면들이 24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우리나라가 1998 월드컵 네덜란드에게 5대0으로 진 새벽, 운동장에 가 울면서 공을 찼다. IMF의 설움과 겹쳐 더 서러웠다. 2002 월드컵에서 그 눈물은 환희로 바뀌었다.
지난 한 10년은 동네 학교 운동장이 썰렁했다. 그 많던 공 차는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했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리에게 짜릿한 감동과 환희를 줬다. 이제 공 차는 소년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손흥민과 황희찬, 이강인을 흉내 내느라 밥도 거르고 운동장을 뛰어다닐 것이다. 모두들 먼 훗날 추억할 골 하나씩 넣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