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시지프스의 돌 그리기

등록일 2022-11-29 19:13 게재일 2022-11-30 17면
스크랩버튼
오일파스텔은 피카소도 즐겨 쓴 재료 중 하나다. /언스플래쉬

최근 각종 취미개발 플랫폼에서 오일파스텔을 활용한 수업들이 많이 보인다. 미술 재료 도구 중 하나인 오일파스텔은 파스텔의 한 종류로, 크레용과 파스텔의 중간 정도 질감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파스텔에 왁스나 기름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기존 파스텔보단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그려지며 특유의 촉촉하면서도 매끄러운 질감 표현 덕분에 그리는 재미가 크다. 또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이 크게 필요치 않고, 물이나 팔레트 등의 도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장소든 간편하게 그릴 수 있단 장점이 있다. 덕분에 전문가뿐만 아니라 많은 미술 입문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재료기도 하다.

오일파스텔은 기존 파스텔보다 단단하고 가루가 없으며, 입자가 두껍기 때문에 굵거나 두터운 굵기 표현이 가능하다. 오일파스텔에서 가장 재미있는 특징은 색 위에 색을 얹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가장 손쉬운 재료인 손가락부터 압지나 얇은 가죽으로 말아 만든 찰필 또는 티슈나 스틱, 면봉 등의 재료로 세밀한 색 섞기가 가능하다.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효과를 자연스럽게 줄 수 있을뿐더러, 치즈나 빵 등의 덩어리지는 느낌이나 쌀의 고슬거리는 질감 같은 섬세한 그리기 또한 가능하다.

오일파스텔이 생소해서 다소 역사가 짧은 듯싶지만 사실 오래 전 입체파를 대표하는 화가인 피카소도 즐겨 쓴 재료 중 하나다. 오일파스텔은 평면상에 여러 선이나 색채로 형상을 그려내는 회화의 표현이 충분히 가능하면서도, 명암 위주로 그림을 그리는 소묘의 성격까지 모두 가졌다. 목탄에서 시작하여 파스텔, 그리고 오일파스텔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 흥미로운 미술 도구다.

오일파스텔은 단순히 흰 도화지에 색을 가득 채워 넣는다거나 스케치 안에 색을 칠하는 방법도 있지만 긁어내기, 찍기, 덮어씌우기, 혼합하기 등 다채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표현할 때에 재미가 더해진다.

오일파스텔은 무른 성질 때문에 종이 위로 미끄러지듯 그려진다. 힘을 얼마나 주는냐에 따라 색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때문에 생각했던 색과는 전혀 다르게 나올 때가 있다. 색을 많이 써보고 힘을 얼마만큼 주어야 하는지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며 더 나은 그림이 나올 수 있도록 나아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기까지 하다.

나는 주로 러닝을 한 뒤에 그 날 본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그림을 그린다. 가만히 배경을 들여다보면 자연은 정확한 틀이나 일정한 규칙을 가진 모양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각기 다른 본질이 섞여 있고 그것이 모두 일정치 않고 다양한 선과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에 더욱 자연스럽고 경이롭다는 걸 알게 된다.

구름은 단순히 흰색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하늘색, 분홍색, 보라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이 자연스레 섞여 있다. 생각하지도 못한 색상이 겹쳐 서로를 물들이고 있을 때에 대상이 더욱 구체적으로 보인다. 색과 색이 자연스레 연결되어 섞일 때의 즐거움은 배가 되고 그리기의 행위는 더욱 자유로워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스케치를 한 뒤에 작은 디테일을 잡아가는 과정을 유유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가득 채워진 색을 마주하면 걱정이 조금씩 녹아 물러지는 기분이 든다. 명암이나 색감, 형태 등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여러 색이 겹쳐 하나의 존재로 다가올 때면 종이 위로 생명력이 느껴지며 활기가 돈다.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날카롭게 깎곤 했던 다짐이 조금씩 누그러져선 끝내 안정이 찾아온다.

근래 들어선 돌을 자주 그리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가장 맨 아래서부터 올린 바위는 산꼭대기에 다다르자마자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무한으로 돌을 굴러야 하는 시지프스의 벌은 영원히 끝나지 않기에 의미가 없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니체는 이를 두고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이 허무주의를 받아들이되, 오히려 나 스스로 중심을 정하여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원한 허무 속에서의 초인의 모습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무언가 덧없다거나 중심이 흔들리는 날엔 크고 작은 바위를 그린다. 신기하게도 그릴 때마다 다른 모양, 다른 색을 지닌 각각의 돌이 탄생한다. 그렇게 나의 중심은 부드럽게 그려지고 수많은 색을 띠고 있다. 그렇게 눈으로 확인하면 퍽 안심이 된다.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