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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핍이 자랑이 될 때

등록일 2022-11-22 17:52 게재일 2022-11-2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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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진 자리는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언스플래쉬
낙엽이 진 자리는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언스플래쉬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생각은 오후의 그림자처럼 자꾸만 길어진다. 그간 내가 이뤄온 성취와 다짐, 소망, 꿈꾸는 미래의 방향성이나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나의 단점까지 떠오른다. 스스로가 대견하다가도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콧잔등 위로 눅진한 빛이 내려앉으면 불현듯 하나의 깨달음이 밀려온다. 아, 가을이구나. 그래서 이렇게 감상적이구나.

그런 날들이다. 달력을 한 장 넘기면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몇 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해가 밝아있을 것이다. 올해의 나는 어땠던가. 이번 해는 제대로 살아냈는가. 뭔가에 쫓기듯 바쁘게 살았지만 매일같이 실수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발걸음이 중심이 아닌 언저리를 돌고 있다는 감각.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우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요즘에는 잠이 부쩍 많아졌다. 온종일 잠자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가끔은 잠자는 행위가 최후의 도피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훼손되었다고 느끼는 날, 절망이나 고통과 같은 불행의 감정들이 내 안으로 썰물처럼 밀려드는 순간이 오면 나는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향함을 상상한다. 거기에서 나는 단 하나의 부족함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된다. 통장에 돈이 넘치도록 가득하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근심이라곤 없는 하루를 보내는, 비극적 사건은 절대 찾아오지 않으며 주변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그런 사람.

그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걸 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정말 있는 줄만 알았다. 그들이 세상의 다수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낙관적인 세계에서 산다고 여겼으며 웃는 얼굴의 사람들 사이를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헤집고 다녔다. 그러면 어떤 상실감이 찾아왔다. 인생을 운용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하나의 조각, 그것을 이미 획득한 자들에게 질투를 느꼈으며 그 열등감이야말로 내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그런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두려웠던 적도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나를 두고 결핍이 많은 아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영 들키고 싶지 않던 비밀을 폭로 당한 사람처럼 마음이 홧홧해졌다. 그렇지만 친구 앞에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씩하게 웃었다. 내 안에서 자꾸만 떠오르는 어떤 부정성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슬픔, 모자람, 추하고 가끔은 천박하다고 느껴지는 내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었다.

손에 쥔 것에 별로 없다고 느껴질 때 나는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우울을 본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메마르고 텅 빈 몸이 되는 것이다. 늦가을의 책상 앞에 앉아 삶에 대해 몇 시간이고 고민하는 날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문장으로 적어내려는 시도도 없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세상을 불신하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질투하고 연민하는 일. 세상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고 평온한 일상에 목말라하는 일. 이것은 모두 살아서 역동적으로 꿈틀대는 감정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이제 나는 나의 결핍을 자랑으로 여긴다. 내 안에 비루하고 나약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지 않지만 인간으로 남게끔 해준다. 쓸모없고 형편없는 것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나의 영원한 한계이면서 동시에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라는 것을 안다.

나는 나의 결핍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 혼자만 아는 어떤 표식을 남겨놓는 행위를 하는 일은 모두 나의 결핍 덕분이다. 나는 나의 결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소통하며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다.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떤 방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 버석버석한 낙엽이 차곡차곡 쌓인 거리를 바라본다. 이제 곧 긴긴 겨울이 온다. 늘 같은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나무는 다가올 추위를 견디고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황망하리만치 텅 빈 자리는 더욱 빼곡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런 순환과 믿음을 떠올리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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