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이틀 뒤 월요일, 오전 수업에서 출석 확인을 위해 학생들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다가 목이 멨다. 안녕을 묻기조차 죄스러운 아침에 학생들에게 “무사하게 여기 앉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50명 정도가 수강하는 수업이라 매주 네다섯 명쯤은 결석하는데, 이날은 이름을 불러 대답이 없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수업 마치고 조교를 통해 연락했더니 다행히 모두 별 일 없었다. 요 며칠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낙엽 위로 늦가을 햇살이 부드럽기만 하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는 그런 나날이다.
참사 직후에는 슬픔보다 분노가 더 컸다. 주체할 수 없어서, 학생들에게 다소 격한 목소리로 거친 생각을 토해냈다. 아니다. 감정을 토해냈다. “먹고 놀고 마냥 웃고 즐기는 티브이 예능프로그램들 몇 개만 남겨두고 싹 다 없애면 좋겠다”고 운을 뗀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갔다. 학생들에게 말한 내용 그대로 옮긴다.
티브이도 SNS도 환상만 주입하지 현실은 말하지 않는다. 이태원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만 보게 하지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 차와 사람이 마구 뒤엉켜 복잡한 도로, 마약과 성범죄 등 어두운 그늘은 은폐한다. 여행지의 아름다움만 노래하고 강도나 인종 혐오 등 치안 위험에 대해선 함구하는 여행상품이나 마찬가지다. 미디어와 SNS는 환상을 부추기면서 현실을 망각시킨다. 잊어야 할 괴롭고 팍팍한 현실이 얼마나 많으면, 다 잊고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 잊게 하니 문제다. 현장에 출동한 구급차와 경찰차를 보고 핼로윈 코스튬인 줄 알았다고 한다. 사이렌 소리에 맞춰 음악을 틀고 노래 부르며 뛰었다. 환상에 취해 현실감이 마비된 것이다.
축제의 주말을 즐기러 이태원에 간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사람들에게 환상을 선물하면서 현실을 빼앗아간 미디어의 잘못이다. 도시 인프라의 몸피보다 몇 배는 큰 대중의 욕망을 다 수용도 못하면서 미디어와 함께 방관하고, 환상이 무너졌을 때 추락하는 이들이 무사하도록 완충력 지닌 튼튼한 현실을 만들지 못한 위정자들 잘못이다. 소방관, 경찰, 군인 등 제복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 풍조도 그렇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그 사실을 알면 쾌락원리를 위반하는 환상에 속지 않고 절제할 수 있다.
쾌락은 아름다운 것이고, 환상 없이 우리는 살 수 없지만, 쾌락은 무책임하다. 환상은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너무 황당해 믿을 수 없는 이 참사가 환상이면 좋겠다.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의 비극이 악몽이었다는 듯, 다음날 오후 텅 빈 이태원 거리가 다른 세상 같다. 하지만 현실이다.
다른 거 다 차치하고,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은 서울이 초과밀도 사회라는 것이다.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서로 빽빽하게 끼여 숨 막히면서 사는 도시다. 서울이라는 사회는 인구의 밀도를, 자본의 밀도를, 욕망의 밀도를 다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인 서울’을 꿈꾸게 한다.
그러나 제일 안타까운 건, 아직도 대한민국이 타자에 대한 관용, 다름에 대한 존중이 없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사회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핼로윈이라 해도 좀비 분장을 하고, 코스프레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타인의 따가운 눈총과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곳은 서울에 몇 군데 없다. 대한민국에서 오직 이태원만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 여러 가치, 다채로운 개성, 전위적인 서브컬처, 소수성이 한 데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다. 이태원밖에 없기 때문에 이태원으로 모여든 거다.
“놀다가 죽었다”는 말을 누구도 쉽게 뱉어선 안 된다. 유년기부터 자연스레 핼로윈을 축제로 받아들인 청년들에게 이태원은 타인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들뜰 수 있는 곳이다. 놀다 죽은 게 아니라 그냥 걷다 죽은 사람들이다. 들뜨고 신난 게 잘못인가?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라면 10만명 아니라 100만명이 모여도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아야 한다.
더 말을 잇지 못하겠다.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있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