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발화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어딜 가도 조용히 사색하는 사람 보다 지치지 않고 떠드는 사람만 보인다. 나부터 그렇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일기장은 물론이고 지면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 여기저기에 끼적여놓은 문장을 보면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운 감정까지 든다. 이것이 필요한 이야기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이브하지 않은가? 매일매일 비슷비슷한 문장을 적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쓰는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은 작아질 대로 작아져서 반쯤 베어 문 땅콩보다 더 조그매지는 기분이다.
글을 쓸 때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나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성격이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정적을 참지 못하며 침묵과 함께 찾아오는 엄숙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어려운 일을 위트 있게 넘기고 싶어서 상대에게 무례한 언사를 행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책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다음에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침묵을 견디는 사람이 될 거야. 다짐해보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그러한 결심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다시 시끄럽게 떠드는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것도 없었던 때,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 주변을 왜곡시켜 보거나 마냥 숨어 있고 싶어 했던 시절, 나는 어떤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의미한 행동은 세상에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잘못되었어. 그러니까 이 세계가 망할 수밖에 없는 거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의 말을 가로막고 상대가 얼마나 편협한 관념에 갇혀 있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너는 왜 본질을 못 봐? 나는 선명하고 자신감 있는 척했지만 끝끝내 어떤 것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어리석음을 인지하면서도 발화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굳이 이해해보려는 태도야말로 내가 존립할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 그때의 나는 이상한 결연함이 있었다. 입을 다무는 것은 비겁한 것이라고. 끓어오르는 언어를 숨기지 말고, 밖으로 모두 드러내 보이자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말하는 양은 더욱 늘어났고 발화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의 거친 언어는 정제되었고 강의의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불안이 들었다. 뭔가를 선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위험한 방식인 것 같은 기분. 이것은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하고 강조하는 말은 원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가 선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주입하려 했다. 나는 말하는 것을 멈추고 물었다. 너희의 생각은 어때? 그들의 입에서 놀라운 언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들여다보지 못한 지점과 알지 못한 세계를 전달받았다. 끝끝내 장악할 수 없는, 아니 장악할 필요가 없던 그들의 역사였다. 비로소 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어렵다. 발화보다 경청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다정한 마음과 체력이다. 상대의 말을 하릴없이 듣다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불쑥 끼어들어 이런저런 것들을 정정하고 싶다. 그러나 상대의 말 뒤에 숨은 마음을 느끼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순간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건 굉장히 근사한 일이다.
소설을 쓰는 내내 나는 발화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어딘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독자를 상상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내뱉는다. 그러나 한 쪽에서 나는 듣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소설 속 인물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활자로 옮기는 일을 한다. 말하는 마음과 듣는 마음은 맞닿아 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뭔가를 바꾸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불안과 불만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세상에는 계속해서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외롭고 어려운 투쟁을 지속하며 누군가에게 가닿으려 애쓰는 마음이 있다. 그것에 대해 한 마디를 더 보태는 것보다 이야기를 듣고 곱씹고 생각해보는 태도. 거기서 기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말하는 마음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듣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다정한 마음의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