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주 주말 서울 예술의전당 회원 음악회에 다녀왔다. 매년 가을마다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것)의 뿌듯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2년씩 세 번, 6년째 예술의전당 골드회원을 유지 중인데, 회원 음악회 한 번이면 연회비 10만원이 아깝지 않다. 아니 황송할 정도다.
거장 정치용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세계적인 플루티스트 최나경과 협연했다. 1부는 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와 메르카단테 ‘플루트 협주곡 e단조’, 2부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으로 꾸려진 무대였다.
음반과 유튜브로만 듣던 월드스타 최나경의 연주를 눈앞에서 보니 쥐떼들이 왜 피리 소리 따라가다 연못에 빠져 죽었는지 알겠다. (내가 또 쥐띠다) 메르카단테 협주곡 1악장 플루트 솔로의 첫 음이 울리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음악은 세계를 여럿으로 분리하기도 하고, 이미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합하기도 한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는 걸까, 넋 놓고 들었다. 현악단의 합주 때 악기를 내려놓고 독주를 기다리는 그녀 표정과 몸짓도 다 음악이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은 그저 경이로움이었다. 플루트를 모르지만, 플루트로 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다 본 것 같았다. 특히 바이올린의 피치카토 주법을 플루트로 소리 낼 때마다 무슨 마술을 보는 기분이었다.
2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곡 자체가 지닌 격정적이고 강렬한 에너지와 그것을 차분하게 통제하고 조율하고 극대화시키는 정치용 지휘자 사이의 상응이 아름다웠다. 2악장은 다른 교향곡들의 4악장 이상으로 세게 치닫고, 4악장은 몇 개의 클라이맥스가 있는지 다 셀 수 없을 정도. “불행한 결혼에 몹시 고민하던 시기의 산물”이라는 곡 해설을 읽고 미혼이지만 이해 완료되었다. 음악 듣고 결혼과 더 멀어진 느낌이랄까.
모든 현악기가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3악장에서도, 태풍처럼 몰아치는 4악장의 격랑 속에서도, 앙코르곡 슈트라우스 ‘관광열차 폴카’의 경쾌함 가운데서도 단원들 표정은 편안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쾌했다. ‘소통’을 중시한다는 정치용 지휘자의 부드러운 리더십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연상케 했다. 커튼콜 때 각 파트 단원들을 일일이 일으켜 박수 받게 한 다정함 역시 아름다웠다.
단 하나 아쉬운 건 역시 ‘관크’(타인이 영화나 연극 등을 관람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뜻의 신조어. 관객+크리티컬의 줄임말)다. 플루트 협주곡 마지막 3악장이 무르익을 때 내 옆옆 자리서 울려 퍼진 스마트폰 인공지능 음성, “음악을 찾지 못했어요. 주변 소음이 너무 심하지 않은지 확인해주세요” 소리가 크기도 했고, 오래 지속되기까지 했다. 지난 3월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공연 때도 똑같은 관크가 발생했다고 한다. 본인도 당황했겠지만 한 사람이 느낀 당혹감은 2천명 관객이 빼앗긴 감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발레리를 인용하자면 “음악의 세계와 소음의 세계는 분명히 갈라져 있다. 하나의 소음이 하나의 고립된 사건임에 비해 하나의 음악은 저 혼자서 우주를 만든다. 연주회장에서 한 악기가 떨어 울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의 시작이라는 느낌, 한 세계의 시작을 갖게 된”다. 그런데 “어느 연주회장에서 교향악이 울려 퍼져 위압하는 동안에 만일 의자 하나가 넘어진다든가, 누가 기침을 한다든가, 문이 닫혀진다든가 하는 일이 생긴다면, 당장에 우리는 무언지 모를 파열의 인상을 갖게 된다. 그 순간 베니스 유리와도 같은 본성의 그 무엇이 깨어지거나 금간 것”이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인공지능은 음악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음악을 소음으로 인식했다. 내가 어제 연주회장에서 본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한계다. 모든 걸 데이터화해 무한 반복하는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 즉 아우라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날 콘서트홀에 울려 퍼진 인공지능의 음성에도 최나경의 아우라는, 음악의 한 우주는 조금도 깨지지 않았다. 음악이 이겼다. 인간이 기술을 이겼다.
연주회가 끝나고,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음악당 광장을 걸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좋았다. 멀리 있는 것이 잠시 가까이 온 그 느낌, 아우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