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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한다고요?

등록일 2022-07-10 18:00 게재일 2022-07-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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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어. 겨울이 되면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해요. 나는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나를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지난 5월 말에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2화에서 염미정이 구씨에게 한 말이다. 염미정은 대출까지해서 전 남친한테 돈을 빌려줬다가 떼인 후 대출금 상환 독촉을 받고 있고,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나 염미정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낯선 남자 구씨는,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술만 마신다. 이어서 염미정은 구씨가 겨우내 자신을 추앙하면 봄에는 자신도 그도 달라져 있을 거라고 한다.

이 방송이 끝난 후 SNS에는 ‘추앙하라’가 흘러넘쳤다. 한편으로는 구씨의 상태 때문에 염미정이 그런 말을 더 쉽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염미정은 추앙 말고는 다른 말을 찾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예전의 남자친구들에게 심하게 이용만 당했기 때문이다. ‘추앙하라’가 인기 있었던 이유는, 일상에서는 잘 안 쓰는 단어라서 신선한 느낌도 들었을 테고, 그만큼 사랑에 지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염미정을 향한 구씨의 추앙이 아무리 멋지게 표현되어도, 채워지고 싶다는 염미정의 갈망이 아무리 간절해도, 추앙이라는 말은 위험해 보인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라는 ‘추앙하다’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추앙하는 쪽과 추앙받는 쪽의 균형이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노파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들의 추앙이 본의와는 다르게 오용되거나 남용될까봐 걱정이 앞선다. 사실 염미정이 말하는 추앙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다. 추앙이라고 하면 나는 팬클럽 문화가 떠오른다. 어느 가수의 팬클럽에 가입했다가 추앙하지 못해서 팬클럽 회장에게 권고 탈퇴를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더 그럴 것이다.

로이스 로리의 ‘기억 전달자’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미래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이 ‘늘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언어생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주인공 조너스가 지각한 이유를 말하면서, ‘연어 구경에 정신이 돌아버린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선생님은 연어 구경에 ‘정신이 돌았다’는 단어는 너무 강하다면서 ‘정신이 팔린’으로 교정해준다. 이 마을이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논란거리이기는 하나, 조너스 어머니의 이런 입장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요해 보인다.

어느날 조너스가 부모에게 ‘절 사랑하세요?’ 묻자, 부모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일반화된 단어라 무의미하다면서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즐거우세요?’, ‘어머니 아버지는 제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세요?’와 같이 정확한 표현을 써야 마을이 원활하게 돌아간다고 알려준다. 염미정의 소망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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