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부터 먹고 움직인 것을 매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체중도 조금씩 빠지는 중이다. 이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의지가 대단하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던 중 ‘대화의 희열’에서 발레리나 강수진이 나온 영상을 보게 되었다.
발레리나 강수진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아시아인 중 최초로 입단하였고, 2016년에는 원할 때까지 수석 무용수 자격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종신 단원 자격을 아시아 최초로 얻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마디마디가 모두 툭툭 튀어나온 그의 발가락은 그런 성취를 위해 그가 얼마나 혹독하게 노력했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발가락 부상으로 1년간 쉬었다고도 하니 영상을 보기 전에는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 방송에서 강수진은 그렇게 노력한 것은 관객에 대한 예의이면서 자신에 대한 예의라고 한다. 관객에 대한 예의는 금방 이해가 되지만, 자신에 대한 예의라는 말이 무척이나 인상 깊어서 곱씹게 되었다.
우리는 예의를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과 의리 또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마땅히’라는 말 때문인지 그렇게 해석하면 강박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예의의 의미를 찾아보니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이라는 뜻도 있다. 이 뜻으로 강수진의 말을 해석해보면 ‘나에게 존경의 뜻을 표하는 행동’이 되어 이해가 잘 된다. 관객에 대한 예의라는 말도 더 설명이 잘 된다. 이렇게 강수진이 자신에 대한 예의로 그렇게 노력했다고 이해하니,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육체를 돌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육체를 돌보는 방법에 극기의 노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한 학인은 내 몸과 대화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썼다. “발등에 금이 갔는데도 쉬지 않고 일했지. 한 달 동안 깁스를 하고 있느라 말도 못 하게 힘들었는데 열심히 끌고 다녔어. 정말 내가 왜 그랬을까? 내 몸에 붙어 있는 것이니까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줄 알았나 봐. 그때 너무 무모했던 것 같아. 소중한 걸 몰랐어. 이제는 소중히 여기며 살게.” 얼핏 보면 강수진은 자기 몸을 혹독하게 다루었고, 학인은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어서 정반대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 2권에서 그리스의 양생법을 설명하면서 그리스인들의 도덕적 성찰에서 주요한 관심은 육체를 돌보기 위해 쾌락의 감소를 고려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목표는 자신의 육체에 대해 적절하고 필요 충분한 배려를 하는 주체로 자신을 세우는 것이었다고 한다.
푸코의 설명을 들으니, 예의를 위해 고통을 감수하거나 아픈 몸을 배려하려는 마음이나 모두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세워가고 있다는 점에서 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먹고 움직인 것을 기록하는 것이 예의인지 배려인지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그 역시 나 자신을 삶의 주체로 세워가는 과정이리라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