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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빛깔 머금은 곡식들 캔버스 수놓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22-02-16 20:29 게재일 2022-02-17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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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br/>올해 첫 기획 ‘정정엽 물구나무 팥’展<br/>4월 24일까지 봉산문화회관 4전시실
정정엽作

대구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의 올해 첫 번째 초대작가는 서양화가 정정엽(60)이다.

정 작가는 이화여대를 졸업했으며 여성의 삶을 주제로 작업을 이어가는 여성주의 미술 운동의 대표 작가다. 1980년대부터 여성주의, 생태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회화, 설치,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기억공작소’는 봉산문화회관이 중견작가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기획한 전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지의 어머니가 선사하는 풍요로움이 넘쳐흐른다. 이 땅의 빛깔을 머금은 팥, 녹두, 검은콩 등의 곡식들이 캔버스 위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한 알 한 알 정성 담은 곡식들이 하나의 점이 돼 하늘의 별도 되고, 시뻘건 용암이 돼 꿈틀거리기도 하며, 때론 캔버스의 구석이나 바닥, 그리고 벽에 뿌려지거나 소복이 담기기도 한다. 마치 나약함이 뭉쳐 큰 힘을 내는 유기적인 생물처럼 보이는 이 알곡들이 집합과 산란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인위적이거나 획일적인 요소를 배제하며 자연의 법칙에 순응한 모습으로 조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이는 생명을 머금고 잉태하는 씨앗이자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일용할 양식으로 모든 자연의 순환이 내포된 또 다른 작은 세계로 집약하게 한다. 작가는 그 속에서 곡식으로 밥을 짓고 살림하는 여성의 보이지 않는 반복적 노동을 씨앗으로 심고 있다. 하찮게 치부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작가는 매일 곡식을 쓰다듬듯 붓질해가며 꾸미거나 과장 없는 원초적인 행위로 또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태도 아래 ‘일상의 위대함’을 성실함과 꾸준한 회화적 실천 방법으로 축적된 시간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봉산문화회관 조동오 큐레이터는 “정 작가는 인간만이 아닌 나와 함께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과 지구적 시선을 비범하지만 결코, 무겁지 않으며, 하찮은 소재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공존하는 삶과 환경에 대해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작가는 2020 양성평등문화인상, 2018 제4회 고암미술상을 수상했다. 정 작가의 작품은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성남큐브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수원아이파크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정정엽 물구나무 팥’전은 오는 4월 24일까지 봉산문화회관 2층 제4전실에서 열린다. /윤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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