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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또 다른 동반자

등록일 2022-01-26 20:29 게재일 2022-01-2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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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낙률시인·국악인
오낙률시인·국악인

겨울이면 땔감과 먹거리가 곤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가 사회적 차원에서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사람들은 음식물에 조금만 이상이 있거나 과식의 위험이 있다 싶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음식물을 내다 버린다. 과거,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가 크게 죄악시되던 시절과는 크게 비교가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음식물을 버리는 방법에서도 과거와 현재는 많이 비교된다.

필자의 어릴 적 기억에 의하면, 커다란 물통을 부엌 가까운 곳에 두고 버려진 음식물 하며 심지어는 설거지 한 물마저도 한데 모아 쇠죽 끓이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부엌과 연결된 하수구에는 지렁이 같은 미물들이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극소량의 음식물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공생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가축이 없는 집에서는 버려야 할 음식물이 생기면 가축을 기르는 이웃집까지 가져가서 가축에게 먹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과거에는 음식을 버려도 버리는 게 아니라, 심지어 지렁이나 박테리아 같은 미물들의 먹이로 이용된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도시에서 엄청난 양으로 버려지는 음식물들을 생각하면 그 버려지는 방법에 있어서 의심의 눈길을 멈추기 어려운 형편이다.

실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생명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음을 통해서 시야에서 멀어져 갔는지를, 만약에 그들의 죽음이 모두 분해되지 않고 쌓여 있거나 땅속에 묻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땅의 여기를 파도 저기를 파도 그들의 주검이 나온다면 인간의 삶은 어떠했을까.

인간에게 그런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파리이거나 구더기이거나 그보다도 더 작은 하등의 생물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삶의 동반자에게도 눈길을 돌려 보은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파리나 구더기가 득실대는 환경에서 살아도 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작은 생명에게까지 감사한 마을을 가지고 그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자연을 마주하고 사는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오늘날 지상에 사는 생명체가 어디 인류뿐일까. 어차피 자연과 공존하고 상생하는 것이 인류의 삶이라면, 인간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다고 느껴지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하등의 생명에게까지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함이 마땅하다.

아마, 인간부터 먼저 살고 봐야 하던 시절엔 주위의 다른 생명들에게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물의 순환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서 어느 정도 풍요를 누리고 사는 인간은,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저 인류의 또 다른 동반자들에게 배려와 사랑의 눈을 돌려 세심하게 그들의 삶도 응원해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필자가 말하는 하등의 생명이란, 요즘 인간 사회활동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바이러스류는 포함하지 않는다. 적어도 생명이라 말함은 햇볕과 물과 흙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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