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낙률시인·국악인 머지않아서 봄을 맞은 갖가지 식물들이 봄비를 맞으며 대자연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필수 법칙인 거리두기 생장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일년생 식물은 물론이고 높은 산야에서 자라는 나무까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가끔 조밀한 곳에서는 그들만의 전염병이 창궐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수많은 식물이 조기에 지상에서 사라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천에 풀과 나무들이 다 죽고 벌거숭이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거리두기를 실천하여 산천은 더욱 푸르고 들판에 초목도 더욱 무성히 우거질 것이다.
2022-03-02
오낙률시인·국악인 동네 어귀 느티나무 가지에서는 벌써 까치들이 잔가지를 물어다 나르며 알 낳을 둥지를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다. 오늘따라 까치울음이 저렇게 정답고도 경쾌하게 들리는 것은, 오는 봄날에 태어날 새끼까치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는 저들의 희망의 소리가 아닌가 싶다. 계절의 봄은 또 저렇게 오고 있는데 지난 2년 동안 잃어버린 우리네 인간의 봄은 올해도 종무소식이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작년에 이어 또 한 번 절감할 것 같다.새해 벽두부터 우리는 평소보다 더 많은 생각과 판단을 요구받는 시점에 서 있다. 아직도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에 붙들려 마스크를 한 체 군중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생활하는 형편이고, 북에서는 연일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긴장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경제는 경제대로 물구나무를 서서 하늘이 거꾸로 보이는 실정이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일을 앞두고 국민은 두 갈래 세 갈래로 의견이 찢어져 갈등하고, 다투어 상대 진영의 대통령 후보와 그 가족들을 닥치는 데로 물어뜯는 모습이, 마치 야수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야수와 인간의 닮은 점은 먹이활동이 살생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고, 다른 점은, 인간은 살생한 먹잇감을 품위 있게 먹고, 야수는 살생한 먹잇감을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점이다.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이 국민의 인기 투표에서 이겨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그것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라면 어찌 대통령 선거를 국민적 축제라 말할 수 있을까.게임을 하는 데는 언제나 내 편 아닌 남의 편이 있게 마련이다. 선거도 그렇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승자나 패자나 다 같이 웃으며 악수를 하고 이전의 모습으로 하루빨리 돌아가서 다시금 화목한 울타리를 꾸려가야 하는 게 우리 사회가 묵시적으로 지켜온 규칙 아닐까. 선거에 있었던 어눌했던 감정을 선거가 끝난 후까지 남겨서 그것이 우리라는 공동체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한 사회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세상이 아무리 좋아진다 한들 힘이 약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 따위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제 배 굶주리며 남의 배만 불려주는 그런 사람을 어리석지 않다고 말하는 세상은 결코 아니 올 것이 분명하다. 소위 민주란? 힘센 자가 가진 욕망의 호수에, 먼저 가득히 물을 채우고, 그 호수를 넘치어 흐르는 물이 비로소 넓은 들판에 흘러들어, 풍년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해서, 참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선, 눈앞의 작은 이익의 추구에만 정책의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국민을 하나로 화합시켜서 보다 튼실한 국력을 기르는 정책을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지금으로부터 약 일백 년 전(1925), 마하트마 간디가 밝힌 ‘7대 사회악’의 (원칙 없는 정치. 도덕성 없는 상업. 노력 없는 부. 인격 없는 지식.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 각 항목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나열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2022-02-16
오낙률시인·국악인 겨울이면 땔감과 먹거리가 곤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가 사회적 차원에서 금기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사람들은 음식물에 조금만 이상이 있거나 과식의 위험이 있다 싶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음식물을 내다 버린다. 과거, 음식물을 버리는 행위가 크게 죄악시되던 시절과는 크게 비교가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음식물을 버리는 방법에서도 과거와 현재는 많이 비교된다.필자의 어릴 적 기억에 의하면, 커다란 물통을 부엌 가까운 곳에 두고 버려진 음식물 하며 심지어는 설거지 한 물마저도 한데 모아 쇠죽 끓이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부엌과 연결된 하수구에는 지렁이 같은 미물들이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극소량의 음식물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공생하였다. 뿐만이 아니라 가축이 없는 집에서는 버려야 할 음식물이 생기면 가축을 기르는 이웃집까지 가져가서 가축에게 먹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과거에는 음식을 버려도 버리는 게 아니라, 심지어 지렁이나 박테리아 같은 미물들의 먹이로 이용된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도시에서 엄청난 양으로 버려지는 음식물들을 생각하면 그 버려지는 방법에 있어서 의심의 눈길을 멈추기 어려운 형편이다.실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생명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모를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음을 통해서 시야에서 멀어져 갔는지를, 만약에 그들의 죽음이 모두 분해되지 않고 쌓여 있거나 땅속에 묻혀 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땅의 여기를 파도 저기를 파도 그들의 주검이 나온다면 인간의 삶은 어떠했을까.인간에게 그런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파리이거나 구더기이거나 그보다도 더 작은 하등의 생물들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눈에 띄지 않는 삶의 동반자에게도 눈길을 돌려 보은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파리나 구더기가 득실대는 환경에서 살아도 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작은 생명에게까지 감사한 마을을 가지고 그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자연을 마주하고 사는 인간의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오늘날 지상에 사는 생명체가 어디 인류뿐일까. 어차피 자연과 공존하고 상생하는 것이 인류의 삶이라면, 인간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다고 느껴지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하등의 생명에게까지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 함이 마땅하다.아마, 인간부터 먼저 살고 봐야 하던 시절엔 주위의 다른 생명들에게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제 물의 순환이라는 커다란 명제 앞에서 어느 정도 풍요를 누리고 사는 인간은,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저 인류의 또 다른 동반자들에게 배려와 사랑의 눈을 돌려 세심하게 그들의 삶도 응원해야 함이 마땅하다. 물론 필자가 말하는 하등의 생명이란, 요즘 인간 사회활동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바이러스류는 포함하지 않는다. 적어도 생명이라 말함은 햇볕과 물과 흙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을 말함이다.
2022-01-26
오낙률시인·국악인 설레며 밝아오던 새해도 벌써 며칠 지나고, 소한을 지나 일 년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에 해당하는 대한을 앞두고 있다. 대한까지 지나면 민족의 고유 명절 설날이 되는데 그때 또 한 번 우리는 새해 인사와 덕담을 나누느라 너나없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예부터 사람들은 양력설과 음력 설날을 모두 지내야만 음과 양의 기운을 두루 갖춘 완연한 새해라 여겨왔다. 그러나 신정과 구정 사이에는 약 한 달여의 시간이 있는데 이 시기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시기에 해당하므로 아마도 겨울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는 지상의 나약한 생명들에게는 가장 힘든 삶의 고비가 되지 않을까 싶다.달력이라는 시간의 도표에는 24개의 마디가 설정되어있다. 그 마디를 24절기라고 부르며 그 24절기는 ‘절’이라는 12개의 마디와 ‘기’라는 12개의 마디로 조합되어 있다. 그 조합 또한 음양의 원리로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 24절기가 순환을 반복하면서 세월 또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가래떡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데 우리가 나름의 크기로 종종 썰어 쓰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평생을 꿈꾸며 살다가 끝내는 또 꿈을 꾸려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생명체의 사명은 물의 순환에 있다. 식물이나 동물 할 것 없이 죄다 그렇다. 하지만 동물과 식물의 입장은 좀 다르다. 동물이라는 생명체는 동(動)적인 존재로 타자의 몸에 지닌 물을 취해야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어쩌면 한자리에 뿌리를 박고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살아가는 식물보다도 오히려 더 힘든 생을 꾸려 간다. 그것은 동물류에 해당하는 생명체들의 원죄라 할 수 있다. 해서 원죄라는 단어는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든 동물류의 공통적 원죄를 관통한다.새해의 초입에 들면 필자는 습관처럼 죽도시장 어판장을 찾는다. 그리고 가끔 걸음을 멈추고 생선 파는 아낙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곤 한다. 행여 새해의 힘찬 기운을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느껴볼까 해서다. 죽도시장 어판장에서 나이 칠십은 족히 넘었을 아주머니들의 표정에서 향내를 느낀 기억이 있다. 장사꾼의 돈은 개도 안 물어 간다는데 수많은 손님을 대하면서도 싫은 표정 한번 짓는 법이 없었다. 그 아주머니들의 속내는 발효가 잘되어 마치 백설처럼 하얀 것 같았다. 속이 거름처럼 썩은 게 아니고 배꽃처럼 하얗게 발효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온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려도 싱싱한 꽃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올해도 마스크 때문에 그 싱싱한 참꽃 미소를 보지 못해 못내 아쉽다.필자의 어린 시절엔 들일 나가는 소의 입에 머거리라는 마스크를 채웠다. 좁은 들길에 소를 몰고 가노라면 소가 길가에 자라는 농작물을 한입씩 뜯어먹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려는 주인 농부의 특별한 조치였다.어쩌다가 요즘은 사람들이 죄다 소 머거리 같은 마스크를 하고 살아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202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