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출발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세계사에서 이보다 더 극적일 수가 없는 대반전의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유럽 최강대국 스페인의 위상에 눌려 해상 변방국에 불과했던 영국은 200년 후 비교가 되지 않는 절대 열세의 해군력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침 시킨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절대 열세의 영국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기동력과 기습공격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전술과 영국 최고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리더십을 말 한다. 전선으로 출격하는 군인들에게 ‘그대들은 나보다 더 훌륭한 리더를 만날 수 있어도 나보다 그대들을 더 사랑하는 리더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평생 미혼으로 보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연설은 단연 압권이다. 환호하는 영국해군의 사기는 하늘을 집어삼킬 듯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포항시청 대잠홀에서 ‘포항 11.15 촉발지진 범시민 대책위원회 활동 시민보고회’가 열렸다. 지난 2017년 11월 15일 오후 2시 29분에 포항에서 규모 5.4도의 대형지진이 발생했다. 외형적으로 나타난 강도는 5.4도였지만 진원지가 지표면 얕은 지점을 감안하면 국내에서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이라는데 모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고 대입 수능이 일주일 연기될 만큼 사상 초유의 국가 대재난 이었다. 이런 와중에 참으로 놀랍고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려왔다. 포항지진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공지진일 가능성이 높다고 세계적인 학술정보지인 미국의 ‘사이언스’에 게재한 두 교수의 용기 있는 발표는 2019년 3월 정부조사 연구단이 두 학자의 발표와 동일한 결론을 내림으로써 포항시민들에게 어둠속의 한줄기 빛과 같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정부조사단의 발표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 포항 11. 15 ‘촉발지진 범시민 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포항시를 대표하는 57개 사회단체에서 77명이 참여할 만큼 메머드 급 규모였다. 이날의 시민 보고대회는 위원회가 걸어온 2년여의 험난한 여정과 눈부신 활동으로 가득 채워 졌다. 어쩌면 지방자치 시대의 관, 학이 서포트(Support)하고 민(民)이 주도하는 단체의 성공한 모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경이로운 성과를 도출하고 있다.
범시민 대책위원회는 대 시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촉발지진을 일으킨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국회, 산자부, 청와대로 보폭을 넓히며 지진특별법 제정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특별법 제정이 지지부진하자 여야당사 항의집회와 2019년 10월에는 총 3천여명의 시민들이 청와대 상경집회를 통해 그해 연말 드디어 지진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에 이르렀다.
잘 아는 바처럼 촉발지진 범시민 대책기구는 4인의 공동체제로 출발한 그대로 마무리하고 있다. 포항사랑과 책임감으로 다져진 이들 4명의 리더십도 주목할 만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조직의 균열이나 잡음하나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완벽한 찰떡공조를 이룩해낸 열정어린 노력은 포항시민들의 눈높이를 충족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세상에 그저 되는 부자는 없듯이 저절로 굴러 들어온 기회보다는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기회가 훨씬 소중한 것이다. 좌절과 시련은 괴롭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 역사에는 국가나 개인도 예외 없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세기 세계최강 마케도니아 제국의 건설은 5만의 군사로 40만 다리우스 황제의 페르시아 대군을 궤멸시키는 위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한고조 유방도 항우에게 쫓겨 간 파촉 지방에서 와신상담하며 통일제국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개인도 예외는 아니다.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일리노이 주의원을 시작으로 부통령, 상원의원 등 7번의 선거에서 낙선한 링컨은 실패를 교훈삼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다.
정약용의 생애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는 유배지에서 독서와 저술에 온 힘을 기울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같은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을 쏟아냈다. 유배지에서 자책과 울분으로 세월을 보냈다면 결코 해 낼 수 없는 업적이다.
포항에는 철강도시 이후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 의료, 관광분야를 망라한 새로운 도시를 만들어 가야하는 막중한 책무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깊어도 세월이 지나면 아물지 않는 상처는 없다. 내진설계를 강화하고 친환경적인 정책을 실천하는 유산을 물려준다면 포항지진의 아픔보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포항시민인 것이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새해는 검은 호랑이 해다. 숲을 지배하는 흑호는 뛰어난 리더십과 열정, 용맹함을 자랑한다. 포항의 지도자, 시민이 하나가 되어 호랑이의 기운을 듬뿍 받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더불어 51만 포항시민에게 전화위복, 부위정경의 반전의 드라마를 쓴 지진대책 위원회의 노고에 진심어린 신뢰와 감사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