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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열매, 그리움으로

등록일 2021-12-22 19:52 게재일 2021-12-2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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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차를 우린다. 바짝 말랐던 꽃잎이 화사하게 물에서 피어난다. 찻물이 서서히 노랗게 변한다. 찻잔을 입에 대자 떫은 향이 입안에 퍼진다. 한 모금 입속에 모았다가 삼킨다. 입안에 떫은맛이 금방 사라지고 은은한 차향이 남는다.

봄이 오면 고향마을 뒷산에 산수유꽃이 가장 먼저 피었다. 건너편 진달래가 신호를 받아 드문드문 연분홍 꽃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땅들은 들썩들썩,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꽃들이 몸을 비틀기 시작한다. 따스한 바람이 불면 어느 사이 산수유가 뒷산을 가득 물들였다.

사물에 대한 추억은 사람마다 다르다. 계절에 따라, 함께하는 이에 따라,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억이 소환된다. 내게 산수유나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다. 산수유꽃이 피면 노란 꽃그늘 아래 어머니가 있고 열매가 열리면 열매를 따서 가을 햇볕에 말리는 어머니가 있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어머니의 산수유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삶은 몹시 추웠다. 하루하루를 넘겨도 도무지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머지않아 봄이 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농사일에 허리 한 번 펼 수 없을지라도. 어머니는 봄을 좋아했다. 뒷동산에 산수유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면 자주 중얼거렸다. 봄이 와서 꽃을 피웠는지, 꽃이 피어 봄이 왔는지.

의성 산수유.  /김순희 작가 제공
의성 산수유. /김순희 작가 제공

산수유는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산수유꽃은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꽃으로 보인다. 꽃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면 꽃차례에 노란색 꽃이 소복이 모여 있다. 자그마한 우산을 펼쳐 놓은 것처럼. 마치 별들이 하늘 향해 모든 것을 열어놓은 듯하다. 하늘바라기, 별바라기, 꿈바라기가 거기에 얹혀있다. 충분히 별바라기 했다면 산수유는 이제야 열매를 맺는다. 봄꽃이 모두 피고 지고, 여름꽃도 사라지고 단풍조차 다 떨어진 후에 손톱모양의 열매를 단다.

산수유나무의 고향은 중국 산둥성이다. 산둥성에서 구례군 산동면 계척마을로 시집온 새색시가 산수유 열매를 들고 와서 심었다고 한다. 새색시는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정서도 많이 달라 힘들었지만, 시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했다. 새색시는 통일신라 말기의 유학자 최치원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최치원이 중국에서 공부하다 급히 귀국하면서 딸에게 산수유씨앗을 쥐여줬다고 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신라 청년을 만나 지리산 산동면에 시집왔다. 새색시는 많은 날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녔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새색시는 고향의 어머니 또한 많이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마당 안팎에 심은 산수유나무를 보듬고 그리움을 달랬다. 그때 심은 산수유나무가 천 년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할아버지나무, 할머니나무, 아들나무도 있다. 지금까지 구례군 산동면 일대는 산수유꽃과 산수유 열매로 가득하다.

이순혜​​​​​​​수필가
이순혜​​​​​​​수필가

산수유나무를 ‘대학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산동마을 사람들은 산수유 열매를 팔아 자녀를 공부시켰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꽃을 따서 말리고 열매를 수확할 때 산수유 꽃그늘 아래 있음을 감사하게 여겼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사랑 덕분에 나무도 살아가고 그들의 아이들도 살아갈 수 있었다. 산수유나무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우리와 같은 생명체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나 싶다. 산수유 열매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열매를 따서 씨를 털어내고 말려 차로 마시면 오장육부를 튼튼하게 해준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마음까지 따듯하게 데워준다. 산수유차는 온갖 부정한 것을 물리친다고 하여 많은 이들이 즐겨 마신다.

어머니의 산수유는 어떠했을까, 고된 노동에서 허리 펼 때 보았던 희망이었을까, 오종종히 어머니 어깨에 매달린 자식들의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오롯이 산수유꽃과 열매만으로 함박웃음 지었을 어머니의 마음이었을까, 고향의 씨앗을 땅에 묻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것은 또 다른 그리움의 표현이었을까, 골짜기마다 산수유가 물들인 것을 보며 새색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어디에다 그렸을까. 얼마나 깊은 곳에 새겼을까.

인생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건넌다.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들이 시끌벅적 폭죽을 터트려 꽃을 피울 것이다. 노란 꽃물에 내 마음을 앉혀놓고 있으면 곧 가을에 이르러 붉은 산수유 열매를 볼 것이다.

창가에 앉아 산수유 열매를 본다. 창밖의 바람에도 찻물이 노랗게 일렁인다. 내 안의 세포들이 일어나 추억 한 장을 갈무리하고 페이지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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