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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것과 살아날 것의 조우

등록일 2021-12-19 20:03 게재일 2021-12-2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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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경주읍성 벽과 발굴한 석재들.

경주라는 이름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가 끝날 때이다. 경순왕이 서라벌을 떠나 개성에서 항복하면서 신라의 천년 사직이 끝나고 도시 이름도 서라벌(금성)에서 지금의 경주로 바꿨다고 한다. 천년을 간직한 이름이다.

천 년을 견뎌낸 유적과 갓 백 살을 넘긴 건물을 만나러 갔다. 천 년이라는 세월을 펼쳐보기 전에 짧은 시간을 살아낸 경주역을 미리 만나보기로 했다. 곧 폐역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와서 먼저 그리로 발걸음을 옮겨 눈도장을 찍고, 고려 시대에 토성으로 태어나 조선 시대에 석축으로 변신하였다가 일제강점기에 성벽 50m만 남기고 그 형태의 대부분이 헐렸던 경주읍성을 나중에 알현했다.

어린 시절, 안동에서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왔었다. 처음 맞닥뜨린 곳이 경주역이다. 비둘기호에서 내려 지하도를 지나 광장으로 나왔을 때 어찌나 넓었는지, 신라 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이 살았다던 그 역사적인 도시의 입구를 두리번거리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때도 역 지붕이 기와였었나, 광장 오른편에 삼층탑이 선 공원이 있었드랬나 아련하지만 말이다. 두 줄로 서서 역 근처의 민박에서 하룻밤을 자고(사실은 까불고 노느라 거의 밤을 샜다.) 새벽에 석굴암으로 일출을 보러 가려고 또다시 역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갔다가 다시 경주역에서 안동으로 돌아갔었다.

여행이라는 이름을 처음 내게 안겨준 곳이 경주역인 셈이다. 남편은 여기서 서울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고 했다. 나와 같은 기억을 간직한 이들이 전국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이의 추억의 장소인 이곳이 28일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러다 건물이 없어지고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다 기억하던 우리가 사라지면 함께 잊히고 말지 모른다.

경주역에서 차로 3분 거리에 읍성이 복원되었다기에 가보기로 했다. 경주읍성은 1012년 고려 현종이 토성을 짓고 우왕이 석축으로 개축하고 네 개 문을 정비하였다. 조선 시대에 경주부 읍성의 길이며 성안에 우물이 83개소이고, 해자(海子)는 아직 파지 않았다는 기록이 문종실록에 등장한다.

일제강점기가 들어서자 전국에 읍성 철거 명령이 떨어졌고, 경주읍성도 철거 대상이 되었다.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2년쯤 불국사와 석굴암을 구경하려고 경주를 방문하였을 때 시내에 들어오는데 큰 성벽의 높이 때문에 차량이 통과할 수 없다고 하자 그대로 동쪽 성벽 조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다. 성벽이 철거된 후 나온 자재는 모두 경주선으로 투입되었다고 하니 경주읍성이 경주역을 만드는데 쓰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인연이 쌓인 두 유적지가 한 곳은 천 년을 버티어 온 경력으로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제 모습을 되찾아 가고, 겨우 백 년을 버틴 짧은 이력의 역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성에 오르니 경주시가 내려다보인다. 향일문에서 서쪽을 향하니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이 기둥 사이에 액자로 걸렸다. 성벽 아래에 복원하면서 발견된 석재들이 놓였다. 마치 역 광장에 수학여행 온 초등생 같다. 전교생이 겨우 세 반인거 보니 시골에서 온 듯하다. 절구 모양으로 물을 담고 있는 반, 건물의 기둥을 받힌 주춧돌 반, 돌로 만든 다리로 사람들을 건너게 한 친구들까지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모여서 옛날이야기를 조잘대는 듯하다. 복원한 새 건물과 철거 위기에도 살아남은 성벽을 이어 놓았다. 그 밑으로 차가 지나다닌다. 스러져 가던 역사가 현재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처럼 보였다. 복원해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 박제된 건축물이지만 이렇게 오를 수 있고 차가 성을 드나들 수 있다면 살아 숨 쉬게 된다.

계림초등학교의 담장 역할 정도만 담당하다가 2014년부터 발굴을 시작해 성벽의 일부가 완성됐다. 학교 옆으로 아직도 한창 발굴하는 중이다. 스러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더디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천년 고도에서 아직은 짧은 시간인 백 년을 살아낸 것들도 스러지기 전에 소중히 간직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 기록해 본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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