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자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에도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에 별다른 거리낌이 없었고, 처음 보는 학우들과 합석을 하는 것도 힘들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단체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어울리는 것에 꽤 최적화된 인간이었다. 술자리가 있다고만 하면 상대가 누가 됐든 찾아가고, 모르는 사람과 합석을 하게 되더라도 지루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곤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그런 행동들이 너무나도 피곤하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그땐 그런 자리 자체를 꽤 재밌게 받아들이기도 했었고, 왠지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었다.
하지만 내가 단체 술자리에 기를 쓰고 참석했던 건 단지 재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술자리에 참석해 흥겹게 놀고 사람들의 웃음을 유발하면서 그 안에서 내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들을 재밌게 하는 사람이야, 나는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이 안의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야… 같은 느낌들을 무척이나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그런 느낌마저 없으면, 내가 왠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으므로.
그렇다보니 나는 술자리에서 내 진심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늘 상대방의 이야기에 휩쓸리기 일쑤였고, 나와는 별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험담을 하거나, 지킬 수 없는 약속에 사람들을 실망시킨 적도 많았다. 술김에 하는 말들이 늘 그렇듯이, 내 대답은 깊게 생각해서 나온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매번 그 말들을 수습하느라 바삐 지냈고, 그걸 핑계로 또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술을 먹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했었다. 성글은 말과 어설픈 진심으로 나와 주변 사람들의 삶을 피곤하게만 만들었을 따름이다.
사실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인지 그런 자리에서라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술에 취하고 기분에 취한 사람들은 늘 나를 추켜 세워줬고, 나는 그런 분위기에서 스스로가 뭐라도 된 양 굴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건 취기와 함께 사라지는 기분일 따름이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남는 거라곤 늘 텅 빈 지갑과 피로감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시금 술자리를 찾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술에 취해 흥겨워하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이었던지라, 코로나가 시작된 후 사람들과 술을 못 마시게 되었을 때 느낀 외로움은 상상보다 컸었다. 맨 정신의 사람들과 하는 대화는 어딘가 엉성하고 모자란 기분이 들었고, 왠지 모르게 다들 속내를 말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어렵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고, 사람들의 말조차 쉽사리 믿지 못하는 불신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건 어딘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 불러온 참사가 아닌가 싶다. 누구라도, 자신의 속마음을 쉽사리 털어놓지는 않는다. 정말로 속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술을 마셨는지 아닌지 따위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눈을 마주보고, 서로의 말에 담긴 진심을 헤아리는 건 술기운이 없이도 얼마든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렇게 술 취한 사람들의 말을 덥썩덥썩 믿곤 했던 걸까. 어쩌면 나에게는 누구라도 좋으니, 진심을 다해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나를 진심으로 믿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참으로 성글게 믿음을 구하며 살았었던 셈이구나 싶다.
술이 아니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외로움을 해소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기에는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떤 이에게 나는 단지 무례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는 내가 건방지거나 피곤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건 그 순간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일. 지나고 나서야 겨우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늘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금이라도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 뿐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