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그의 그라나도스… 모두가 숨 죽이다

윤희정기자
등록일 2021-11-09 19:52 게재일 2021-11-10 12면
스크랩버튼
‘포항음악제’  피아니스트   백건우 독주회<br/>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곡집<br/> ‘고예스카스 Op. 11’ 백건우 손길로 황홀경 선사<br/>인터미션 없이 연주 관객들 찬사 이어져
8일 오후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2021 포항음악제’ 나흘째 프로그램 ‘사랑에 빠진 연인들-백건우 리사이틀’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Shin-joong Kim 제공

“백건우의 그라나도스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했다. 한숨마저 부르는 아름다움, 선율 너머에 숨은 미감, 사랑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간 엇갈리는 빛과 어둠이 있었다. 피아노는 노래했고, 음률은 꿈처럼 시(詩)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인간이 어떤 경지에 오르면 과연 저렇게 음악을 빚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발걸음을 조심히 옮겼고 소리 냄을 멈추었으며,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의 그라나도스에 집중했다. 귀와 마음과 영혼이 황홀해지는 경지였고, 영혼을 실은 연습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완벽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75) 독주회가 포항시가 주최하고 포항문화재단이 주관하는 ‘2021 포항음악제’의 나흘째 프로그램으로 지난 8일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졌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지 올해로 65년을 맞은 거장이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로 꼽히는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곡집 ‘고예스카스 Op.11’을 인터미션 없이 전곡을 연주한 프로그램은 관객들에게 가장 음악적인 음악의 순간을 선사했다.

작곡가 스스로가 ‘고예스카스’의 모든 작품은 사랑, 죽음과 관련돼 있고 고통과 사랑, 비극적 결말의 감정을 담고 있다고 밝힌 만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가득한 곡이었다.

비극의 꼰 도로레(con dolore·슬프게)부터 수정처럼 영롱한 음표들이 가을날 울긋불긋 물든 단풍나무처럼 눈부시게 쏟아졌다. 슬픔을 등에 가득 지고 걸어가지만, 그의 그림자에는 찬란한 빛이 숨어있었다.

첫 곡 ‘사랑의 말’에서는 스페인 민족주의 운동 주역이었던 그라나도스의 애국주의자적 마음마저 얼핏 엿보였다. 스페인 사회의 타락을 풍자하기 위해 만든 판화연작 카프리초스와 탈 파라 쿠알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이었지만 이 곡을 연주하는 백건우에게선 과거 그 어떤 곡을 연주하건 음색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던 투박한 스타일에서 탈피, 대단히 경쾌하고 반짝이는 색채감을 발산했다.

그리고 이러한 섬세한 다채로움은 다음으로 연주된 ‘창문에서의 대화’까지 이어졌다. ‘등불 옆의 판당고’는 변화무쌍한 리듬의 향연이 만개해 백건우의 강건한 터치가 더욱 부각됐다.

발렌시아 지방의 민요를 바탕으로 ‘비탄, 또는 처녀, 그리고 나이팅게일’은 ‘마하’라는 여성이 사랑하는 남편을 향한 안타까운 연정을 노래한 작품 본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더욱 서정적이고 현란한 트릴의 기교가 빛을 발했다.

공연을 마친 피아니스트 백건우. /ⓒShin-joong Kim 제공
공연을 마친 피아니스트 백건우. /ⓒShin-joong Kim 제공

이어 ‘고예스카스’의 가장 핵심적인 정서인 사랑과 죽음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곡 ‘사랑과 죽음 : 발라드’는 같은 제목을 가진 고야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인 만큼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 그 물리적이고도 심리적인 고통이 비극적으로 이어지는 장엄한 터치가 유지됐다.

그로테스크하고 모호한 악상의 ‘에필로그 : 유령의 세레나데’에 이어 마지막으로 연주된 ‘지푸라기 인형’에서 꿈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한탄을 쏟아내고 허무와 비통함을 노래하며 백건우는 내면의 노랫소리를 따라 더 멀리, 더 멀리 가고 있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강민정(51·포항시 남구 지곡동) 씨는 “마치 시어를 조탁해낸 시인처럼 음표 하나하나에 색채와 깊이를 불어넣는 백건우가 빚어낸 나직한 한 음은 속삭임과도 같았고,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순간에는 모두가 생의 상처에 몸을 기댄 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날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꽉 차 백건우에게 거는 기대와 위상을 증명해 보였다. 더불어 연주가가 건반 위에서 손을 내려놓을 때까지 박수를 인내하며 정적을 즐기는 모습 또한 관객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문화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