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건 아닙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지인이 한 말이다. 늘 긍정적인 지인은 필자와 알고 지낸 20년 동안 화를 낸 적이 거의 없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노기(怒氣) 띤 목소리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니, 아이가 정말 오랜만에 학교에 갔는데 말입니다. 아이가 집에 와서 하는 말이….!”
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적이 흘렀다. 학교라는 말에 필자의 긴장감은 급상승했다. 정적이 좀 더 흐르고, 뭔가를 결심한 듯한 심호흡 소리가 지나고 지인이 말을 이었다.
“늦은 시간에 다짜고짜 전화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정말 요즘 학교가 하는 일이 뭡니까?”
저녁 교육활동을 모두 끝내고 학생들이 기숙사로 간 다음이라 교무실에서 조금은 편한 자세로 업무를 마무리하던 필자는 전화 받는 자세부터 바로 했다.
“이 선생, 아직도 학교는 옛날 시간에 머물러 있는 모양입니다. 사회는 참 빠르게 변하는데 말입니다. 21세기에 아직도 교문에서 교복 단속합니까? 코로나가 좀 나아졌나 봐요! 물론 학생에게 규칙을 가르치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가 있지 않을까요?”
지인은 필자보다 교육계에 훨씬 더 호의적인 사람이다. 필자가 교육청이나 교육부 정책에 대해 비판을 하면 좀 더 생각해보라고 필자를 늘 다독이는 지인이었다.
“아이가 3주 만에 학교에 갔는데, 학교에서는 교복 단속부터 했답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건강보다 교복 규정이 더 중요한가 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대로 등교한 학생들을 교문에서부터 범인 검문하듯 하면 안 되지요.”
지인의 말을 듣는 순간 1980년대 교문 등교지도 모습이 그려졌다. 살벌한 모습, 이치에는 전혀 맞지 않은 모습! 하지만 그때 학생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왜냐면 학교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 당시 학교는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희망 공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학생에게 학교는 더이상 어떤 가치도 없는 곳이다. 그냥 가라고 하니까 부모 눈치 보면서 겨우 다녀 주는 것이 학교다. 그런 학교가 학생을 오로지 통제만 하려고 하니, 학생의 분노만 높이고 있다.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학교와 기성세대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관용적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 학교다. 학교는 아직도 권위로 가득 차 있다. 시간이 갈수록 학교는 그 몹쓸 권위를 절대 권력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니 가장 젊어져야 할 학교가 가장 늙어 갈 수밖에 없다. 박물관에나 가야 할 교육이 아직도 자기가 최고라고 행세하고 있으니 문제도 이런 문제가 어디 있을까!
“이 선생, 헌정사상 첫 30대 당 대표가 선출되었다고 정치권은 변화와 변혁의 기대로 가득합니다. 교육계도 젊은 교육 리더가 나오면 좀 나아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