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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란 무얼 남길지 고르는 일

등록일 2021-02-21 19:35 게재일 2021-02-2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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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욱 시인
김현욱 시인

포항에서 경주로 직장을 옮기게 됐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은 종이상자나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가뿐하게 떠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교라는 특성도 있지만, 나는 늘 짐이 많았다. 옮길 때마다 책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을 해도 일 년이 지나면 생각지도 못한 책들이 한가득 쌓여있다. 책뿐인가. 잡동사니는 왜 그렇게 많은지. 이건 뭐지, 싶을 것도 부지기수다. 100리터 쓰레기봉투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버리지 않으면 정리가 안 된다. 보이지 않게 숨길 뿐. 최고요의 책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를 읽으며 이번 기회에 집 정리도 하자고 마음 먹었다. 역시나 책이 문제다. 한숨밖에 안 나온다. 버리자고 골라놔도 다시 집어 들고 망설이는 내 모습이 가엾기까지 하다. 나는 왜 이토록 버리지 못하는가.

“나는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집이기를 바랐다. (중략) 멋진 것, 비싼 것, 남이 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은 것보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가 유일한 기준이었다. 가지고 있던 물건도 필요 없거나 지나치게 눈에 거슬리면 처분했다.” 최고요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라는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다. 반면에 나는 그런 기준이 없다. ‘언젠가 쓰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무엇이든 못 버리게 만든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안 꺼낸 책들, 안 입은 옷들, 안 쓴 물건들이 즐비한데도 막상 버릴 참으로 집어 들면 ‘나중에 쓸모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내려놓게 된다.

집과 주인은 닮는다고 한다. 교실도 담임과 닮는다. 내가 쓰던 교실, 내가 살던 집은 나와 닮았는가? 당신이 사는 집은 당신과 닮았는가? 최고요는 “언제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비움. 공간을 구성하며 집중해야 하는 것은 물건보다는 전체의 분위기다. 물건은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솎아내는 대상이자 치열한 검열이 결론이어야 한다. 비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공간에 대해 오래 고민해본 사람들은 알고 있다”며 정리 정돈이란 물건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남기는 작업이자 물건의 제자리를 정해주는 작업이라고 소개한다. 정리 정돈의 시작은 비움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옆에는 책장에서 꺼낸 책들이 한가득이다. 분리 수거하려고 바닥에 내려놓은 책들이 나를 애잔하게 쳐다본다. 아깝지 않냐고. 후회하지 않겠냐고. 매년 이맘때가 되면 비움의 철학을 실천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버리고야 말 것이다. 꽉꽉 채워진 공간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라는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집은 그런 질문을 할 공간이 아니라고 여겼다. 주어진 대로 사는 곳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원을 가꾸듯 집도 가꾸는 곳이라는 문장에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과연 나는 버릴 수 있을까. 비움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정리를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럽다.

나에게도 물건에게도 미안하다.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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