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떠난 후에 남은 것

등록일 2021-02-14 19:45 게재일 2021-02-15 18면
스크랩버튼
최미경<br>동화작가
최미경동화작가

내 이별의 처음은 7살 때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질 않아 외증조할머니 손에 맡겨진 나는 걸음을 떼자마자 할머니가 데리고 다녔다고 다들 나를 할머니 껌딱지라 불렀다. 초등학교 입학을 한 달쯤 남겨둔 어느 날 할머니는 옥상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뎠고 얼마 후 영영 내 곁을 떠났다.

요즘도 가끔 내 말투를 들으며 고향이 어디인지 묻는 사람이 있는데 부산에서 왔다고 하면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고 신기해한다. 서울 분이셨던 외증조할머니의 고운 말투를 들으며 유년을 보낸 나에게 내 말투는 그녀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게 두 번째 이별은 16살 봄이었다. 일요일 아침 고모라며 전화가 왔다. 부모님 결혼식 사진에서 본 게 전부였던 고모는 엄마를 찾았고 엄마가 없다고 하자 내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렸다. 9살 때 아버지를 처음 본 나는 16살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던 날을 다 꼽아보아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계절에 한 번, 그러다 일 년에 한 번 쯤 아버지가 집으로 온 날은 약속이나 한 듯 엄마가 부재중이었다. 고모와 통화를 하는 동안 나는 부엌에 세워져 있던 다리가 네 개인 양철 상을 펴서 반찬 몇 가지와 수북이 담은 밥을 올려 그가 들어간 방으로 들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가끔 도루코 칼로 연필을 깎던 아버지 이야길 했다. 가난으로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에게 연필을 깎는 시간은 불요했다고 엄마는 말했지만 아버지가 쓰지 못했던 연필은 내 마음에 뾰족이 남아 쓰는 일에 심(心)이 옅어질 때마다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리고 2012년 가을, 셋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질 않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더 이상 카드 값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결혼 전부터 엄마는 나와 동생의 카드를 돌려쓰며 병원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해 학자금대출 받았다 생각하고 개인회생신청을 하자고 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간암 진단을 받았고 딱 1년 6개월을 버티고 떠났다. 서른여섯, 세 번째 이별이었다. 온전히 슬플 시간도 완벽하게 그리울 시간도 없었다. 내 모자란 경제력이 엄마를 너무 일찍 보냈다는 죄책감에 나는 그저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일만 했다.

지금 이 시간, 이 공간, 내 모습 하나하나가 지나온 시간 안에서 부딪히고 스며들었던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부분은 간과할 수 없다. 기로마다 순간마다 오로지 내가 결정한 내 선택의 결과물이 나를 여기로 데려다 놓은 것이기에 지금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그렇다.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것도 그들이 남긴 것을 안은 것도 버린 것도 나였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의 나는 어떤 우연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런데 그런데도 말이다. 내 말투며 내 시심(詩心)이며 내 생활력을 부둥켜안고 오늘까지 살아내고 있는 내가 한없이 가없게 여겨 질 때가 있다.

떠난 이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이 시간이자 꽁꽁 얼었던 겨울이 봄에 살살 풀리고 있는 이 계절이다.

아침산책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